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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산행기

by 옥도르

한라산. 해발 1950m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한다. 전날까지만 해도 고작 지하철 계단을 오르면서 헉헉대던 내 체력을 믿지 못하여 과연 정상을 찍을 수 있을지 걱정이 돼가지고서는 전날 잠도 못 자고 계속 긴장하고 그래서 배도 하루종일 꾸륵거렸다. 안되면 난 중도 포기하고 친구만 올려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만큼 몸상태가 100퍼센트는 아니었다는 것. 이래저래 잠도 푹 못 자고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새벽 4시경에 온, 바람 때문에 백록담을 오를 수 없다는 문자를 보고서는 정상을 오를 수 없다는 아쉬움과 정상까지 안 가도 되니 그리 힘들진 않겠다, 오히려 좋다는 양가감정이 우릴 파고들었다. 낙오(둘 뿐이지만)될 걱정은 좀 덜었지만 그래도 또 언제 이렇게 마음먹고 올 수 있을지 모르는데 정상을 못 본다는 건 꽤나 아쉬운데.. 아이 그래도.. 아니 아쉬워... 의 무한반복이었다. 뭐 그래도 일단 가자. 호텔에서 한라산 등정을 위해 준비해 준 물과 주먹밥과 셔틀버스 안내를 받으며 듣기로는 바람 때문에 못 간다고 한 거면 웬만해선 안 바뀐다고. 거의 포기상태로 첫 걸음을 딛자, 플랜 b를 이미 준비해 놓은 친구가 가고 싶은 카페가 있다고, 비행기 시간까진 시간이 남을 테니 다시 내려온다면 카페 들렀다 가자고 하여 그 희망 한 송이, 그리고 혹시라도 문이 열려 있을 희망도 한 송이 쥐고서 오르가 시작했다. 전날 비가 온 건지 땅이 젖어서 질퍽거렸지만 먼지가 안 날리니 오히려 상쾌했다. 이래도 긍정, 저래도 긍정! 긍정의 힘이 우리의 엉덩이를 더 가볍게 해주는 듯했다.
친구의 조언에 따라 관음사로 올라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오르는 길은 한라산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게 무슨 산인가 할 정도로 풍경이랄 게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산해서 이름을 검색해서 알게 된, 제주조릿대라는 식물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아, 이게 있으면 한라산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싶었다. 우리도 꽤 이른 시간에(7시) 출발했는데 이미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를 앞질러가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우리의 페이스대로 체력안배를 잘했던 것 같다.(역시 산악인! 외쳐 갓시은!) 이리저리 곁눈질한 결과 생각보다 젊은이가 많았고, 또 생각보다 어르신들도 많았다. 혼자 온 사람들도 많았다. 확실히 길이 잘 닦여있고 관리소 측에서 안전에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 혼자 가기도 좋을 것 같았다.
근데 어라?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하니 체력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긍정의 힘도 있었지만, 뭐랄까 그.. 산의 정기라는 것이 완등할 수 있는 힘을 준 것 같다ㅡ피지컬 면에서는 이지은 허벅지 돌려 깎기가 진짜 도움 됐다. 유튭 영상에서 회색 말벅지를 심심찮게 확인 가능하다ㅡ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상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주어진 행운이 없던 힘도 솟게 한 걸까? 너무 신나서 여전히 부어 있는 얼굴로 영상을 찍고 춤추고 노래하고 난리부르스(?)를 떨고 나서야 진정하고 대피소에서 단 거 먹고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얼음나무들, 즉 사철나무에 얼어붙은 얼음이 쨍한 햇빛에 비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계속해서 사진을 찍느라 발걸음을 멈춘 탓에 제시간에 정상에 오르고 하산하기가 빠듯할 거 같았다. 근데 어떡해 너무 예쁜걸.. 그 예쁜 것도 잠시였다. 얼음이 언다는 건 기온이 어느 이상으로 오르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나 어리석은 인간은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해발 1900미터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기에 이른다. 준비해 간 플리스를 바람막이 안에 입는 과정도 험난했다. 배낭 버클이 풀리지 않아 10분간 온 말초가 얼어붙는 고통을 참아야 했고, 정상에 도착했으나 정상 인증사진을 찍는 줄은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떤 등산객 분의 말씀에 의하면 정상 온도는 영하 10도쯤이었다고. 비가 왔었기에 백록담에 물이 정말 예쁘게 고여 있었지만 제정신으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멘털붕괴의 현장은 유튭 영상에서 확인해 주세요^,*) 정상에서 우아하게 김밥(무려 김만복전복김밥)과 라면을 먹겠다는 생각은 아예 할 수도 없었다. 바람이 이렇게나 부는 산 정상에 계속 있는다면 흔적도 없이 나뭇잎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놓은 정신줄은 챙기지도 않은 채 친구와 나는 둘 다 말도 없이 도망치듯 성판악 코스로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에 가까운 성판악코스는 정말 정말 험난했다. 내려오는 게 진짜 x빡셌다. 내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성판악 코스는 기억에 남는 장면이 크게 없다. 돌무덤, 계단, 돌무덤, 계단 반복하다 보니 어찌어찌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다. 진달래 대피소에는 진달래가 4월에도 피지 않는다. 육지는 벌써 지고 없는데. 배가 이미 고팠지만 먹을 곳이 없어 남은 간식거리를 털어 넣듯 먹은 상태였다. 김만복 김밥. 전날 공항에 퀵으로 배달시켜 하루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이 날 점심을 위해 이고 지고 가지고 온. 맛도 비주얼도 진짜 너무너무 가지고 오길 잘했다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정말 탁월한 선택! 텀블러에 끓인 물을 넣어왔지만 냉수가 되어 있었고 친구의 보온병 덕에 컵라면도 먹을 수 있었다. 눈물 나는, 감동의 맛이었다. 아 근데 참, 대피소에 쓰레기 버리고 간 사람들 반성하세요!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갖고 가야지!! 사실 올라가면서 쓰레기봉지를 허리춤에 차고 쓰레기를 주우면서 올라갔었는데 내려올 때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 길이 너무 험했다. 계단이 힘들 거 같지만 계단이 훨씬 편하다. 돌로만 된 길에 사탕봉지 같은 것들이 정말 많이 보였는데 줍다가 내가 거기서 버려질(?) 것 같아, 그 대신 버린 사람들을 저주하며(넝~담~) 내려오던 길에 119 구조대원 분들이 들것을 들고 올라오고 계셨다. 아마 성판악 코스에 부상자가 발생한 듯했다. 거의 열 분 정도가 한 팀으로 출동하고 계셨는데 이런 험한 산을 맨몸으로 구조하러 다니신다니.. 절로 존경의 눈빛이 발사되었다.
부상자분이 무사히 구조되길, 우리도 부상자 되지 않게 하산의 끝의 끝까지 낙엽 한 장도 조심히 밟자고 다짐하며 또 길에만 집중하는 정적의 시간이 흘러갔다. 순간 폐가 씻겨지는 느낌이 들어 산거미집 쳐있던 입을 열었더니 마침 친구도 그 생각을 했단다. 크으... 한 팀이 된 건가 우리!?(오글주의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마지막 대피소인 속밭대피소에서 물 한 모금, 칼로리 한 움큼 보충하고, 기온이 다시 올라갔기에 플리스도 다시 벗어 가방에 넣고 1시간 20분여를 더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노루도 보고, 무사히 내려오게 해 주셔서 감사함과 남은 산길도 무사하게 해 달라는 기원이 담긴 돌탑도 쌓았다(유튭영상 봐주셔요오).
그렇게 산을 내려와 정상등정 인증서를 출력하고, 뿌듯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인증사진 몇 개 찍고, 쓰레기장에 오늘의 우리의 흔적을 정리하고 길 건너에서 한라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땅을 밟고 있을 수 있게 한 모든 것에 감사하다는 마음에 울컥했다. 정말로 겸손하고 겸허해지는 순간이었다. 제일 고마운 건 날 거의 끌고 와주다시피 한 시은이(mbti:JJJJ). 러뷰. 너의 생일날 올라갈 수 있어서 더 행복했어♡
1박 1일 일정이었지만 비는 시간 1분도 없게 꽉꽉 채워 고등어회랑 한라산소주까지 맛보고 올 수 있었다. 진짜 오래도록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 이렇게 피드에 박제해 놓고 두고두고 꺼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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