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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Jul 02. 2022

쿠션어 논란에 대해

Why so serious? 그냥 필요에 따라 흘러가는거야


https://medium.com/@kurtlee/스타트업은-유치원이-아닙니다-7fad4b48e87f


트위터를 보다가 이런 이슈를 보게 되었다.


 요약하면 회사에서 간접적으로 말을 돌리는 화법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다. 트위터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회사에 올리고 싶을 정도로 공감이 간다는 이야기랑, 또 반대에선 "쿠션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쿠션어를 안 써도 되는 인간들의 속 편한 이야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논리"


 나는 쿠션어에 커뮤니케이션의 베이스라인을 공적인 레벨에서 사적인 레벨로 옮기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해주세요"라는 간결한 말에는 화자의 권위와 역할, 필요가 반영되어 있다. 때문에 콜드 하게 느껴지고 화자의 주체적인 욕구가 관계를 드라이브하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덕분에 사회의 모든 공격성을 제거하려고 드는 PC운동가 입장에선 쿠션어를 안 쓰는 사람이 몰지각한 사람이 된다)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긴 말에는 수행이 벌어질 먼 미래의 가정과 화자의 기분이 들어있다. 때문에 따뜻하게 느껴지고 말이 두리뭉실하게 느껴지게 된다. 전자와 반대로 화자의 주체적 욕구를 제거하는 언어의 구조다. 그리고 요청을 받는 사람은 이 요청을 거절하게 되면 상대의 기분을 어지럽히게 될 거란 것도 암시받게 된다.


 때문에 개인적으론 후자의 요청을 더 거절하기 힘들다. 업무의 레벨에서 대화를 한다면 짧은 요청이 온만큼 짧은 대답을 하면 되지만, 사적인 레벨로 대화를 하게 되면 긴 요청에는 긴 대답이 요구되고 관계를 파괴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도 신경 써야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간곡한 쿠션어는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자신의 요청의 정당성을 숨기는건 화자의 민감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숨기면 숨긴대로 모르는 사람도 있기도 한데, 나는 민감함 둔감함의 밸런스가 수부지 피부마냥 복합적이다)


 공적인 일을 사적이고 인격적인 레벨로 끌고 내리고 가는 이 전략은 남녀 간 연애나 복잡한 복마전이 이뤄지는 중고등학생들의 교우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사장과 직원들이 형과 아우, 언니로 지내는 가족 같은 회사, 고객과의 관계에 종속적인 업종(재래시장상인, 필라테스 강사)에 전략으로는 쿠션어는 아주 적합하다.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하고 원하는 것을 리스크 없이 얻는 게 쿠션어의 본디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공적인 영역에서 이런 부드러움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쓰는 조직에선 이런 게 조금씩 불필요해진다. 고객, 파견,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시니어, 주니어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뒤섞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비교적 동질적인 조직. 파트너십과 프로페셔널리즘이 일의 성격을 주도하는 조직(애자일이 지배하는 개발자 조직), 체계적인 룰과 도구로 커뮤니케이션 규칙을 세세하게 만들어놓은 대규모 조직(군대) 그 예일 것이다.


 둘 다 각자 쓰임이 다른 거니 자신의 속한 전장이 어떤 곳인지 이해하고 쓰고 싶은걸 쓰면 된다. 조직의 관리자라면 자신의 조직이 어떤 곳인지 명확히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문화를 촉진하면 될 일이다. 관리자가 아니라면 더 할 일이 많다. 쿠션어가 탐탁지 않다면 웃지 않으면서 ☺️ 이모지콘을 힘들게 찾고 있을 상대를 위해 쿠션어를 쓰지 않았다고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사람임을 어필하는 것도 일이다. 쿠션어가 좋은데 쿠션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탐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쿠션어라는 짝사랑을 그만둘 계기가 되면 좋고 짝사랑이라 하더라도 이게 상대가 쿠션어로 받아주지 않는 세계가 심각한 문제 또는 자신을 향한 인신공격이 아님을 인지함으로써 이 분노와 억울함을 없앨 수 있다면 좋을 일 아니겠는가.


 나는 실용주의자다. 언어에 드러난 마음을 경멸 또는 분노하는것은 식욕과 싸우는거랑 비슷한거라 생각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거다. 세상은 이렇게 생겨먹었고 생겨먹음에 따라 통하는 전략이 있을 뿐이다. 쿠션어를 쓰고 안씀이 그 사람을 드러내는게 아니다 .유치원을 운운하면서 광역 도발을 날리거나 '쿠션어를 쓰지 않는게 강자들의 논리' 같은 레토릭으로 세상을 저주하는것이 미성숙한 커뮤니케이션이나 인생관을 드러낼 뿐이다.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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