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야기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던 곳,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607 성복천이다.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에서 시작해 분당 탄천을 지나 서울 송파구까지 쭉 이어진 이 천 길이다. 신호등이 없어 가다 멈출 필요가 없다. 아파트 단지 통로와 대로와 연결되어 천길을 들고나는 것이 쉽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달리는 사람, 출퇴근을 하는 사람, 쉬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여느 동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천 길이다.
그 흔한 천길은 2020년 이후 나에게 특별한 곳이 되었다.
2020년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전 세계를 덮쳤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방책과 치료방법이 나올 때까지 정부는 더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학생은 등교 대신 온라인 비대면 홈스쿨링으로, 사무실 근로자는 출근 대신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꼭 필요한 외출 이외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방학 같다며 좋아했고 남편도 아침시간이 여유롭다며 좋아했었다. 좋아하는 그들과 정반대로 나는 이 상황이 정말 싫었다. 평소에 아침과 저녁 두 끼 챙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추가로 점심과 간식까지 챙겨야 했었다. 주방에 있는 시간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한 끼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면 바로 또 다음 끼리를 준비해야 했다. 오죽하면 '돌밥(돌아서니 밥 할 시간)'이라는 단어가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돌밥만으로도 벅찬데 다섯 식구가 종일 집에만 있으니, 가만히만 있어도 바닥에 먼지와 머리카락들이 수북했다. 청소기를 매일 돌려도 금방 더러워졌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티도 안 난다는 얘기를 실감했던 시절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돌밥과 집안일에 점점 지쳐갔다. 내 눈에 식구들의 행동이 조금만 거슬려도 버럭 화를 냈다. 아이들의 작은 실수나 잘못에도 나의 또 다른 자아 '수지의 조지나( )를 소환했었다. 언제든 돌아와 편히 쉴 수 있어 따뜻했던 집이라는 공간이 답답하고 짜증 나는 무거운 곳으로 변해갔다. 코로나가 인간의 생명만 위협하는 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생활도 위태롭게 하는 존재였다. 언제까지 코로나 탓만 할 수 없었다. 언제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며 혼자 외줄 타는 일상에 변화가 절실했다. 생존을 위한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짧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노력했다.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이나 다 자는 시간에 무작정 집 밖을 나왔다. 거기서 만난 곳이 성복천이다. 걷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 늦은 밤, 탄천을 걷다가 갑자기 한번 달려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마흔세 살까지 내 인생에 '달리기'라는 단어는 체육시간, 체력장 시험, 화장실이 급할 때, 횡단보도에 녹색등이 깜박일 때, 술 마시고 주사 부릴 때 이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내가 뛰어보고 싶었다니. 그 시절 남편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나의 최애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글을 쓰는 2025년 12월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2km로 안 되는 거리를 러닝화도 신지 않을 채 무작정 뛰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20분 정도 뛰었던 것 같다. 엄청 빨리 뛴 것도 아니었는데 숨쉬기가 힘들었다. 뛰고 나서 한참 동안 컥컥거리며 침을 흘렸다. 그때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을 처음 이해할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학창 시절 내가 왜 100미터 달리기를 16초 안에 뛰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한 번도 숨 가쁘게 뛴 적이 없다. 뛰지 않는다고 혼을 낸 사람도 없었다.) 땀으로 젖은 몸은 끈적였고 요동치는 심박은 멈출 생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개운했다. 그리고 달리기 전엔 몰랐던 나무다리 위 삐그덕 거리는 소리, 미세한 오르막과 내리막의 경사, 그리고 사람들의 소리가 느껴졌다. 분명히 힘들었는데 다시 뛰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첫 달리기가 성복천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성복천 달리기는 오롯이 나와 천길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되었다.
봄의 천길은 벚꽃과 철쭉이 한창이다. 벚꽃 구경을 위해 굳이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없다. 벚꽃이 만개할 때는 벚꽃 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고, 벚꽃이 떨어질 때는 핑크빛 눈이 내리는 듯 벚꽃 잎을 맞으며 사진을 찍는다. 벚꽃이 지면 철쭉이 피어 온 천을 자홍색 빛으로 물들인다. 그쯤 천 길 가장자리에 멈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철쭉에 홀려 가던 길을 멈추고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여름의 천길은 종일 시끄럽다. 그 중심에는 여름이 끝날 때까지 무한 반복 재생되는 매미 울음소리가 있다. 잠시 쉬어갈 만 한데, 참 성실하다. 새벽과 초저녁 시간에는 천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히는 어른들과 물고기도 없는데 장대를 들고 나와 첨벙거리는 어린아이들로 북적인다. 마치 피서철 극성수기 관광지 풍경과 흡사하다.
가을의 천길은 나의 최애 길이다. 온도도 바람도 하늘도 내 스타일이다. 좁은 천길엔 여름 내 자란 나무 잎과 풀들이 가득하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색들로 천길이 물든다. 종을 알 수 없는 오리와 백로가 천을 찾아온다. 이때 길 위에 잠시 멈춘 사람을 만난다면 그건 필시 오리와 백로를 찍는 이들이다.
겨울의 천길은 사계절 중 가장 고요하다. 가지치기를 끝낸 나무, 미끄럼 방지를 위해 재정비한 야자매트, 곳곳에 놓인 염화칼슘 박스. 겨울철 인적이 드문 천 길이지만 그 어떤 계절보다 누군가의 배려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도 성복천을 달린다. 나무 위에 녹지 않는 눈이 내 눈을 부시게 한다. 달리기가 끝날 때까지 줄곧 내 눈을 따라온다. 달리기 맛집 성복천 오늘의 메뉴는 추운 날 내 몸을 녹여줄 따뜻한 눈부심인가 보다. 나의 첫 달리기 맛집은 화려한 인테리어도 세련된 분위기도 자극적인 맛도 없다. 하지만 언제든 변함없이 나를 맞이한다. 이런 맛집을 어찌 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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