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파트에서 길 하나 건너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지 3주째다. 이전 아파트에서 내가 사는 동 맞은편에 아파트 주민 전용 헬스장이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운동할 시간이 짧을 때 유용하게 이용하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이 아파트에는 관리사무실 이외 다른 시설이 없다. 나와 남편은 조금 귀찮지만, 그나마 집에서 제일 가까운 헬스장을 등록하기로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헬스장을 등록한 이후 23년 만이다. 그렇게 운동과 담을 쌓았는데, 어쩌다 쉰 살에 그 담을 넘어 다시 헬스장에 서 있다.
웨이트를 하는 젊은 남성들,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듯 한껏 꾸민 젊은 여성들, 헬스장 유니폼을 입고 온갖 기구들을 섭렵하는 중장년층. 23년이 지나도 헬스장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변함없는 장면 속에 달라진 게 있다면, 10미터만 뛰어도 숨이 찼던 내가 트레드밀 위에서 10km 이상을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해 전 겨울 주말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동복을 입고 비니와 장갑까지 단단히 챙겨 달리기를 시작했다. 30분을 채 달리지 않았는데 왼쪽 손가락 끝이 아리기 시작했다. 손이 저린 것 같아 주먹을 줬다 폈다를 반복지만 증상은 오히려 심해졌다. 손가락 끝이 아니라 손가락 전체가 아리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날은 영하의 날씨도 아니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몸은 전혀 춥지 않았는데 유독 왼손만 아팠다. 동상에 걸린 적은 없지만 동상에 걸리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1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달리기를 멈췄다. 장갑을 벗어보니 왼손 검지와 중지가 노랗게 변해있었다. 어릴 적 작은 언니가 전기 놀이를 해준다며 내 손목을 꼭 쥐고 내게 나이만큼 손가락을 접었다 폈을 때의, 그때 내 손바닥 색깔과 닮아 있었다. 손을 따뜻하려고 양손을 비비고 겨드랑이에 끼워 보았지만, 손가락의 색도 통증도 나아지지 않았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대략 15분 동안 그 증상은 계속되었다.
그날 이후 밖에서 달리지 않아도 추운 날이면 이유 없이 왼손 검지와 중지가 아리고 뻣뻣하게 굳었다. 일시적인 현상 같지 않았다.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고 의사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종합병원 진료를 권했다. 예약부터 검사 결과 확인까지 한 달이 걸렸다. 그렇게 나는 '레이노 증후군'이라는 낯선 진단을 받았다. 원인도, 확실한 치료약도 없는 이 증후군은 증상이 있다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평생 함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추운 날에는 가급적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이다.
레이노 증후군 진단 후 외투 주머니와 가방에 항상 장갑이 들어있다. 왼손에서 시작된 증상은 어느새 오른손까지 번졌다. 내가 엄살쟁이라서일까. 이제 손가락 하나가 시리기 시작하면 통증이 양손 전체로 퍼질까 겁부터 난다. 해마다 통증은 심해지고 회복은 점점 더디다. 그래서 겨울철 야외 달리기가 점점 두려워진다. 기온이 따뜻해도 바람이 불면 나가지 않고, 바람이 없어도 기온이 낮으면 나가지 않았다. 매번 '안 달릴' 궁리만 하는 내게 레이노 증후군은 꽤 그럴듯한 핑곗거리다. 덕분에 달리기를 쉬는 날이 많아 좋았지만, 가끔 '이래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불쑥 들 때가 있다. 겉으로는 달리기가 싫다고 말하지만, 내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다행히 이 불안은 오래가지 않는다. 밖에서 못 달리면 안에서 달리면 되기 때문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속담처럼 나에게는 헬스장 트레드밀이 있다.
SNS 속 러너들은 겨울이야 말로 밖에서 달리기 좋은 계절이라며, 영하의 기온 속에서 달리는 모습을 인증한다. 그들과 실내 트레드밀 위의 나를 비교하다 보면, 내가 조금 비겁하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생각도 역시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한 배 속에서 태어난 일란성쌍둥이 딸들도 입맛과 취향, 성격이 모두 다르다. 하물며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내 상황에 맞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아침에 눈을 뜨면 날씨부터 확인한다. 오늘, 나의 달리기는 겨울철 달리기 맛집 헬스장 트레드밀이다.
#동네이야기 #겨울철달리기 #트레드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