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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2] '주토피아'의 나무늘보는 실존했다.

7일간의 관공서 오픈런

by 자두치킨 Jul 10. 2024

내 계획에 의하면 캐나다 도착 후 영업일 기준 11일 이내에 다음 목록을 완수해야 했다.

1. SIN넘버 신청(말하자면, 주민등록증 같은 거다.)

2. 중고차 구입 

3. 자동차 보험 가입

4. 캐나다 운전면허증으로 교환

5. 은행계좌 개설, 신용카드 신청

6. 메디케어 신청

7. 패밀리닥터 구하기

8. 첫째 아이 학교 등록

9. 둘째 아이 데이케어 또는 킨더가든 등록

10. 하우스 렌트

11. 하우스 보험

12. 전기 신청

13. 인터넷 신청


현지 거주인으로부터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받을 수 있는 '정착서비스'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기도 했지만 직접 부딪혀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기 오겠다는 결심이 퇴색되는 것 같아 하나부터 열까지 셀프로 처리하기로 한 터였다.

그런데 시차라는 녀석, 파워가 꽤 쎄다. 이곳과 한국과의 시차는 딱 12시간. 한국이 아침 9시면 여긴 밤 9시다. 게다가 캐나다의 여름은 백야 같아서 밤 9시에도 밝고 10시가 되어서야 어스름해지니 비몽사몽 간에 일출인지 일몰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대충 끼니를 때워가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틀이 지나 있었다.


캐나다의 악명 높은 관공서 업무 처리 속도는 익히 들어왔어서 시차부적응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서비스 캐나다(말하자면 '구청' 같은 곳)로 오픈런을 했다. 5월인데도 이렇게 추울 수가... 한겨울 옷으로 꽁꽁 싸매고 아이들과 오픈런을 한 덕분에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SIN넘버를 신청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쉬운 걸? 내친김에 운전면허증 교체해 볼까? 서비스캐나다 직원에게 물으니 '서비스뉴브런즈윅'으로 가야 한다며 연락처와 주소를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여기서 아주 가깝다는 말을 보태며.

"수월한데~?"

라며 나는 감히 한 치 앞을 내다봤다.


'서비스 뉴브런즈윅(말하자면 '행정복지센터' 같은 곳)'은 '서비스 캐나다'에서 차로 5분 남짓 걸렸다. 굳이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를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성격 급한 우리 부부가 이 느리고 느~리~고 느~으~리~이~인 이곳의 단골고객이 될 줄이야.


문제는 운전면허증이었다. 

한국 운전면허증으로 자동차 보험을 가입할 경우 대략 연간 보험료 견적이 $4,600이 나왔다. 캐나다 면허증으로 교체할 경우 보험료는 $2,800으로 줄어든다. 우리는 피땀 흘려 모아둔 돈을 아껴 써야 하는 외노자이다. 나는 네이버보다도 빠른 가격비교로 단 $10달러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었다. 하물며 보험비 차액인 $1,800는 말할 것도 없었다. 캐나다 운전면허증으로 교체하기 위해 다음 중 최소 2가지의 서류를 준비해야만 했다.


1. 하우스 렌트 계약서

: 현재 에어비엔비 임시숙소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 영수증을 인정해 줄까? 하우스는 렌트했지만 계약서는 7월 1일 자로 두 달 뒤라 너무 멀다.

2. 통신료 bill

: 한국에서 미리 캐나다 휴대폰을 개통해 두어서 bill은 받았으나 주소가 임시숙소인 에어비앤비로 돼 있다.

3. Job offer

: 말 그대로 직원 고용을 원하는 요청 레터인데 나는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여러 목록이 있었으나 1번과 2번은 필수 증빙이나 다름없었고 현실적으로 당장 만들 수 있는 서류는 위 세 가지에 불과했다.


첫날은 당당하게 렌트 계약서와 통신료 bill을 들고 갔다. 오픈런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밖으로 길게 뻗어 줄지은 사람들이 보였다. 약 30분을 밖에서 아이들과 오들오들 떨며 대기했다. 입김일지 담배연기인지 정체 모를 것들이 앞을 가렸는데 마치 곧 마주할 우리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방문 목적을 먼저 묻고 증빙 서류를 확인한 뒤에야 직원이 대기표를 직접 발행해 준다. 아마도 오랜 대기 시간을 거쳐 서류 미비로 인해 업무 처리가 불가한 불상사를 예방하려는 의도 같은데, 그보다는 일 처리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케바케, 직바직(직원바이직원)이었다.


첫날은 대기표조차 못 받고 실패.

"너 하우스 렌트 계약서랑 통신료 bill의 주소가 달라. 네가 거주하는 주소의 근거자료가 필요하니 같은 주소를 증빙할 수 있도록 다시 준비해 와."

나는 임시 숙소에 머무르고 있고 곧 하우스에 입주한다는 상황을 설명했지만 내 짧은 영어 탓인지 이 직원은 아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 서류를 반납하고 있었다.

그래, 내일 다시 준비해 오자. 30분의 대기시간이 무색하게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우리 가족은 방금 들어온 입구를 지나 출구로 나왔다. 쫓겨난 느낌은 기분 탓일까?


주소가 같아야 하니 이번엔 에어비앤비 숙소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자.

두 번째 날은 같은 주소를 증빙할 서류 2가지로, 한 달간의 에어비앤비 거주 비용 영수증과 통신료 bill을 챙겼다. 역시 오픈런이었다. 어제보다 더 잘 챙겨 입었다. 전장에 출전하는 장수처럼 비장했다. 옷도, 서류를 든 손도, 마음가짐도. 오늘은 꼭 대기표를 획득하고 말겠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한 사람씩 줄이 줄어들 때마다 긴장이 배가된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어쩐지 다소 비굴한 심정이 되어 소심하게 서류를 들이밀었다. 접수창구 직원이 "하우스렌트 계약서는 어딨어?" 하는 순간 나는 전장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어비앤비는 숙소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란 걸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나는 그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있을 뿐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셋째 날은 하우스 렌트 계약서와 Job offer 레터를 준비했다. 역시 오픈런이었다. 하우스렌트는 7월 1일 자라 두 달이나 남아있어 인정될지가 미지수였다. 어제보다 좀 더 쪼그라든 마음을 '오늘도 안되면 내일 또 하면 돼' 라며 주섬주섬 펴보았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첫째 아이는,

"엄마, 오늘 또 거기 가?" 라며 의아해했다.

예상했던 대로,

"하우스 렌트가 7월 1일이면 너무 멀어. 너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게 아니잖아" 라며 퇴짜 맞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 내일 또 와야 돼?"라고 묻는 첫째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할 때는 웃음마저 터져 나왔다. 입구로 들어가 출구로 나오는 것이 회전문을 영영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우스 렌트 일정을 변경해야만 했다. 나는 집주인과 현재 세입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입주 날짜를 조금 당겨서 계약서를 작성해도 될지 양해를 구했다. 집주인분은 "원래 이렇게 하나하나씩 도장 깨기 하면서 정착하는 거예요. 편하게 하세요." 라며 나를 독려했고 세입자분은 "그래요! 우리 같이 살지 뭐!" 라며 웃으신다. 이민사회에 정착하신 분들만의 여유와 이제 막 정착을 시작한 새내기를 위한 응원이 담긴 따스한 말투였다.


이튿날 나는 조금 자신감을 충전하여 다시 오픈런으로 도전했다. 이 면허증이 뭐라고... 돈만 있으면 그냥 한국면허증으로 해도 될 것을.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돈이 얼마나 무섭고 필요악인지를 절절히 깨달은 나는 여윳돈이 있어도 그럴 주제가 못 된다는 것을 안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게 되는 것이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도.


하우스 렌트 일정을 현재 날짜로 변경해 Job offer와 함께 들고 갔다. 대기줄이 줄어들 때마다 충전해 둔 자신감도 한 칸씩 방전되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접수창구의 직원들과 안전 요원들의 얼굴을 다 알고,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가족 밖에 없었으니 저들도 우리를 알아볼 것이다. 하마터면 반갑게 인사할 뻔했다.


이 날 우리는 접수창구에서 드디어 서류전형(?)을 패스했다. 드디어 각고의 노력이 빛을 보는구나! 기나긴 대기 시간을 기다려 처음으로 창구에 앉을 수 있었다. 서류를 잠시 만지작거리던 핑크빛 머리의 젊은 여직원이 유쾌한 목소리와 엄지를 치켜들며,

"너의 하우스렌트 계약서는 완벽해! 근데 Job offer에 집주소가 없네? 주소가 있어야 접수해 줄 수 있어. 다음에 다시 오면 해 줄게" 라며 재기 발랄하게 웃어 보인다.

"필요 서류에 Job Offer 만 명시돼 있지 주소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은 없잖아!"

온당치 못하다는 표정으로 항의하자 여직원은 양쪽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로 대화를 종결시켰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이젠 Job offer에 주소를 넣어야 했다. 나를 채용하기로 한 사장에게 곧 우리 집이 될 주소를 추가 기입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서류가 바뀔 때마다 출력소에 가서 출력하고 다시 사인을 받아야 했다.

'서비스 뉴브런즈윅'이 있는 멍크턴 다운타운 근처만 가도 이제는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하우스렌트 계약서만 필요했는데 요 근래 이민자들 러시로 서류가 까다로워졌다고 했다.

Job offer에 집주소란을 추가한 뒤 서류를 다시 구비해 다섯 번째 도전을 했다.


몇 차례 드나들며 접수창구 직원 중에 유독 똑똑해 보이는, 체구는 작지만 다부진 동양인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넘나들며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두꺼운 안경알이 그의 눈을 한껏 작아 보이게 했지만 다른 직원들이 그에게 온갖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면 그가 이 조직에서 해결사임은 분명해 보였다.

내 짝꿍에게 말했다.

"저 동양인은 우리 일을 처리해 줄 것 같아. 저 사람이 우리를 접수해 주면 좋겠어. 동양인 만나기가 어려우니 너무 반갑네"

우리의 바람이 그제야 통한 것인지 운 좋게도 우리 순서에 그 스마트한 동양인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헬로봉쥬르!"

그의 쩌렁쩌렁하면서도 또렷한 인사말을 들으며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한민국 여권과 준비 서류를 내밀었다. 더듬더듬 영어로 운전면허증을 교체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섯 번째 똑같은 요청을 하는데 왜 이 간단한 문장 조차도 매끄럽게 말 못하는 거지? 애꿎게 내 탓을 하면서.


"혹시 한국말이 더 편하신가요?"

헬로봉쥬르로 인사하던 스마트한 청년의 물음에 나는 진심으로 놀라 자빠질 뻔했고,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아 앞에 가로막힌 아크릴 가림막이 아니었다면 덥석 손을 잡을 뻔했다.

"한국분이세요???"

내가 한국말로 되물었다. 

이 캐나다 시골 멍크턴의 관공서에서 한국인 청년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청년은 멍크턴의 이민자들이 모두 아는 유명인사라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됐다.

나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제가 오늘까지 총 몇 번째 여길 왔는지 아세요? 이 지점만 다섯 번째예요. 오늘은 서류를 제대로 준비해 왔어요. 꼭 운전면허증 교체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스마트한 한국인은 흘러내리는 두꺼운 안경을 거듭 올리며 내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해 오셨네요. 대기표 드릴게요. 저쪽에서 기다리세요. 그리고 혹시 창구에서 궁금한 점이나 통역이 필요하시면 제이름 XXX를 불러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나는 의기양양하게 대기표를 펄럭이며 의자에 앉았다. 내 짝꿍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냉기가 녹아내린 따뜻한 웃음을 보였다. 그간의 수고로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는 또 설레발을 쳤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창구에서 내 번호를 불렀다.

떡진 흰머리가 섞인 단발머리를 한 체구가 큰 나이 든 여인이었는데 왠지 불길했다. 아주 느린 말투 때문이었는데 이 사람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이 이미지.

서류를 슬로모션으로 한 장 한 장 넘기고 다시 첫 장으로 넘겨서 보고 또 보고 모니터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의미 없어 보이는 마우스 포인터를 여러 차례 클릭하고 느닷없이 다른 직원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는 늘어진 이 모습.


아! 주토피아!

그랬다. 이 나이 든 여인은 주토피아의 나무늘보와 인상착의가 흡사했다. 순하게 처진 눈매와 커다란 눈동자. 두상에 찰싹 달라붙은 군데군데 회색빛 머리카락들, 의자와 하나 된 듯한 안락함을 풍기는 풍채, 아주 느리고 단조로운 음색과 어투. 


맙소사. 

주토피아의 나무늘보는 캐나다 관공서 시스템에 대한 풍자였나 보다. 

나는 이 여인이 지금 내 증빙서류의 활자를 모두 암기하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같은 문서의 같은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들여다 보고 또 보다가 누군가를 불러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을 땐, 모니터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여자는 지금 눈 뜨고 자는 게 틀림없어.


여러 사람을 불러다가 기나긴 토론을 하더니 이 여자는 내 한국운전면허증을 돌려주며 드디어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어 있잖아~ 한국면허증의 2종이 뭔지 나는 모르겠어어~ 네가 뭘 운전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어어~"

내가 이 따위 답을 들으려고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는 줄 아니? 영어만 좀 됐어도 이렇게 되묻고 싶었다.

"여기 그림이 있잖아. 내가 운전할 수 있는 차량의 종류가 이거라고!"

나는 운전면허증에 그려진 차종들을 보여주며 신경질을 냈다. 

"아니이이~이 그림이 너의 말대로 네가 운전할 수 있는 종류의 차를 의미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어어~"

이쯤 돼서 내 눈에 이 여인은 이미 나무늘보가 돼 있었다.

"XXX를 불러줘. 나는 한국사람인데 한국어 통역이 필요해"

"XXX가 누구야~? 나는 그 친구가 출근했는지 몰라아~~~"

"저 접수창구에 있는 한국인 말이야."

(아침부터 줄곧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출근했는지를 모른다고? 이 나무늘보야!!!)

나는 마음의 소리를 꾹꾹 눌러가며 나무늘보에게 짐짓 침착한 척 말했다. 

천천히 목을 약 20cm가량 내밀어 XXX를 슬몃 보더니 온 힘을 다해 의자로부터 몸을 분리해 애써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XXX는 나무늘보에게 상황설명을 듣고 나무늘보보다 훨씬 빨리 나에게로 돌아와서는, 

"마스터 오피스에서 한국 면허증에 대해 승인만 해 주면 되는데, 오늘 토요일이라 퇴근하고 없어요. 대신 지금 마스터 오피스에 메일로 문의를 넣어두고 월요일 아침에 접수 줄 서지 마시고 바로 처리해 드릴 수 있다고 하시네요."

XXX는 포스트잇에 나무늘보의 창구번호와 나와 내 짝꿍의 Client ID를 적어주더니 월요일에 오시겠어요? 한다. 

하아.... 여길 또 와야 한다고...? 그것도 이 나무늘보가 있는 창구로???


토요일과 일요일, 나는 캐나다 운전면허증을 선사받는 꿈을 꿨다. 그것도 두 번이나.


월요일 아침 8시 30분. 휴대폰이 울렸다. 한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 나무늘보다. 

"내가 마스터오피스에 확인했어. 아무 때나 나한테 와아~"

"정말? 정말 고마워. 지금 바로 갈게!"

이 날은 출근 첫날이었고 11시까지는 출근해야 했기에 전화를 끊자마자 서류를 다시 챙겨 서비스뉴브런즈윅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꼭 교체할 수 있겠지? 


나무늘보에게 반갑다는 눈짓을 하자, 긴 갈색 머리를 정갈하게 말아 올린 젊은 여자를 가리키며,

"이 한 명만 처리하고 바로 해 줄게에, 조금만 기다려어~" 했다.

한 명쯤이야. 나는 여유를 부리며 긍정의 의미로 나무늘보와 갈색 머리 여인을 향해 찡긋 웃어 보였다. 갈색 머리 여인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1시간 30분이 돼 갈 쯤에는 내 화를 다스리지 못하게 됐지만.

갈색 머리 여인도 화가 나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곧 첫 출근을 해야 했고 내 화는 이미 폭발해 갈색 머리 여인도 눈에 뵈질 않았다. 

"익스큐즈미"

갈색 머리 여인을 뒤로한 채 나무늘보에게 강경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오는 대로 바로 처리해 주겠다고 했잖아. 나는 11시에 출근해야 하고 지금 1시간 30분을 기다렸어. 도대체 언제까지 더 기다리라는 거야!" 

나무늘보는,

"이 한 명만 처리할게 기다려 줄래애~?" 

갈색 머리 여인은 내가 새치기하려 했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물러나 있다가 그로부터 30분이 더 경과할 때쯤 나무늘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무늘보는 내 걸음걸이를 보더니 항의를 듣기도 전에, 

"저어기 4번 창구로 갈래? 저 사람이 처리해 줄 거야."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는 서류를 들고 4번 창구로 낙심한 듯 걸었다. 출근 시간은 사장과 이야기해 미뤄둔 상태였다.


이제 막 출근해서 4번 창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남자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목소리로 서류를 들이밀며 말했다.

"이 서류는 12번 창구에서 이미 다 확인했던 거야. 너는 승인만 해 주면 돼. 어제 12번 창구 여자가 카피했던 카피본까지 내가 가지고 있어. 너는 카피하지 않아도 돼. 이 서류 가져가면 돼"라고 덧붙였다. 

남자는 엄지를 계속 추켜올리며,

"너의 서류는 정말 완벽해"를 연발했다. 

'그냥 빨리 일이나 처리하라고!' 나는 복화술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나무늘보보다 속도는 빨랐지만 일하는 방식은 유사했다. 봤던 문서를 보고 또 보고 카피하고 또 카피하고...

"아! 이거 내가 조금 전 카피한 건데? 내가 카피를 너무 많이 했네. 하하하하"

종이와 카트리지를 낭비하고, 내 시간을 빼앗고, 내 빼앗긴 시간만큼 대기하는 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앗아간 네가 지금 웃을 때니? 냉담한 내 표정을 본 남자가 실없는 웃음을 거두고 마지막 말을 이었다. 

"이제 다 확인했어. 여기 임시면허증을 줄게. 실물 면허증은 약 2~3주 뒤에 받게 될 거야. 저기 포토존 보이지? 사진 찍으러 가면 돼. 그리고 네 한국면허증은 5년간 우리가 보관할 거야. 그전에 필요하면 찾으러 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몇 미터에 불과한 포토존까지 7일이 걸리다니... 


나무늘보가 포토존을 향해 걷는 우리 가족에게 묻는다.

"다 처리된 거야아~?"

"그래, 고마워."

나무늘보 앞에는 여직까지도 갈색머리 여인이 서 있었다.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웃었다. 그로부터 약 3주 뒤, 운전면허증이 도착했다.

총 한 달여의 시간이 걸려 내 손에 들려진 운전면허증을 보며 나는 잠깐이지만 나무늘보를 떠올렸다.

"나무늘보야 고마워,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https://youtu.be/7QUWQ7vYnfQ?si=jPJnTqqbyJBJLlX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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