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해야 알 수 있지.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인천공항에서 애들 작은 고모 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한 날이 내 짝꿍 생일이었다. 아무에게도 배웅받지 않겠다고 비행기 시간을 쉬쉬했는데 어린애 둘과 큰 짐들을 부부 둘이서 케어하기 어렵다며 자처한 고모네였다. 새벽부터 운전하느라 고생시킨 데다 한정식으로 아침 대접까지 받아 미안한데 장기간 비행에 지루하지 않을 각종 아이템들을 챙겨 아이들 손에 쥐어주던 그 마음새. 그 순간, 여러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내색 없이, 묵묵히, 티 안 나게 우리를 살뜰히 챙겨주던 작은 고모의 그 손. 손끝이 야무지다는 생각은 했지만 단순히 네일아티스트라서가 아니라 그 마음씀이 야무졌던 고모가 항상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런 깨달음은 늦지 않아야 한다. 어머님과 아버님을 잘 부탁한다는 말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1차 경유지인 나리타 공항의 한 레스토랑에서 짝꿍의 생일파티를 했다. 아이들이 이제 '짠'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돼 맥주와 생수를 부딪히며 짝꿍의 생일과 우리 가족의 새 출발을 자축했다.
"우리 가족 잘해보자!"
"응!"
무소불위의 첫째와 그녀를 추종하는 둘째의 씩씩한 대답을 들으니 기나긴 비행시간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열몇 시간을 더 날아 2차 경유지인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헬로! 봉쥬르!'
퀘벡주는 프랑스어권인데 몬트리올 같은 대도시는 프랑스어 외에도 영어가 공용어다. 그래서 인사도 마치 한단어인 듯 '헬로봉쥬르'다. '헬로봉쥬르'로 인사했는데 상대방이 '헬로'로 답하면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고 '봉쥬르'로 답하면 프랑스어로 대화가 시작된다. 나로선 '안녕'이라는 선택지가 없어 난감할 따름이지만 패기 있게 '헬로'로 시작한다. 비자 심사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대화는 바디랭귀지에 구글 번역기까지 동원되긴 했지만.
바이링구얼 비자심사관은 친절하게도 내 서툰 영어를 눈치껏 알아채가며 몇 번씩 그 의미를 확인한 뒤 몬트리올 공항을 나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천국의 계단이 열린 듯 쾌재를 부른 것도 잠시, 한국은 벌써 더위에 정복당하기 시작했는데 몬트리올은 입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춥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비를 뿌릴 듯 말 듯 망설이는 듯했다. 망설임이 확신으로 돌변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미리 예약해 둔 호텔 주소를 기사에게 보여준 뒤 택시를 탔다. 공항 인근의 호텔이라 이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푸근한 인상의 호텔 주인이 '헬로봉쥬르' 한다. 나도 모국어 외에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맘이 문득 간절해진다.
우리가 떠나온 날과 몬트리올에 도착한 날이 같다. 한국보다 느린 몬트리올의 시차 덕분에 짝꿍은 생일을 두 번 맞이했다. 생일 아침은 한국에서 한정식을, 점심은 일본에서 다다키를, 저녁은 캐나다에서 팀홀튼 커피를! 생일 당일에 지구 반대편의 나라까지 3개국을 거쳐간 행운의 가족이라니.
호텔에서조차도 적응되지 않은 추위 덕분에, 트렁크에서 두꺼운 옷을 꺼내 겹겹이 입고 곤한 몸을 호텔 특유의 푹신한 침대에 온전히 맡겨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비행기를 타러 호텔을 나섰다. 마치 우리 가족이 기러기떼 같았다. 장시간 비행에 지쳐 잠시 쉬어가는 지금. 최종 목적지를 향해 다시 날아오를 때다.
우리 가족은 두세 시간가량을 더 날아 최종 종착지인 뉴브런즈윅주 멍크턴에 도착했다. 공항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담했고 시차와 누적된 피로로 탈진해 버린 두 아이를 공항 간이 의자에 뉘인 채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아 무거운 짐과 고단한 몸을 실었다.
캐나다를 감상할 새도 없이, 광활한 하늘과 길고 곧게 뻗은 낯선 도로 위를 천천히 달리면서 어리둥절하다가,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미심쩍어하다가, 교통법규를 어기면 어떻게 하지 노심초사했다가, 여기가 내가 알아봤던 다운타운이 맞나 눈여겨보다가, 가장 먼저 처리하려고 마음먹었던 일은 어디서 하는 거더라 곱씹기도 하면서 마침내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캐나다 시골의 목조주택 하우스. 작지만 잘 가꿔진 잔디밭과 깔끔하게 정돈된 살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캐나다에 도착했지만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당분간은 더 그럴 것이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비행기에서도 내내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피곤하기는커녕 머리가 더 맑아지는 것만 같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무 연고도 없고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이 먼 타국의 시골 마을에 우린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가족과 소중한 이들의 걱정과 응원과 눈물을 모두 싣고.
이제부터 나는,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던 미래와 차례차례 악수를 나누러 또다시 출발한다.
마치 맨 처음 그날처럼 우린 시작하네
여전히 그대로 멈추지 않은 낡은 자동차
시원한 바람 속으로 멀리 달려가네
어딘가에서 기다리는 눈부신 바다를 꿈꾸네
가슴 벅찬 오늘 무척 설레이던 내일
빛나는 시간 속 늘 우리 함께였네
영원한 것은 없다고 모두 말하지만
아직까지 우린 모르네 눈부신 바다를 꿈꾸네
몸을 울리는 북소리
뜨겁게 달궈진 기타
이글거리는 해까지
울려 퍼져라 함성
앰프의 게인을 올리면
Ooh 느껴지는 엔진의 떨림
연료는 늘 풀 게이지
달리자 저 끝까지
밤새도록 멈추지 않는 우리들의 노래 oh-whoa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밤하늘 불꽃처럼 ooh-ooh-hoo-hoo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노래 oh-whoa
수많은 시간을 함께한 오랜 친구 가자 또다시 whoa, whoa
Oh-whoa, oh-whoa
마치 맨 처음 그날처럼 우린 시작하네
어딘가에서 기다리는 눈부신 바다를 꿈꾸네
가슴 벅찬 오늘 무척 설레이던 내일
빛나는 시간 속 늘 우리 함께였네
영원한 것은 없다고 모두 말하지만
하늘은 아직도 푸르네 눈부신 바다를 꿈꾸네
밤새도록 멈추지 않는 우리들의 노래 oh-whoa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밤하늘 불꽃처럼 ooh-ooh-hoo-hoo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노래 oh-whoa
수많은 시간을 함께한 오랜 친구 가자 또다시 whoa, whoa
Oh-whoa, oh-whoa
Whoa, whoa
Oh-whoa, oh-whoa
푸르른 우리의 꿈들 꿈이 아니기를
어딘가에서 기다리는 눈부신 바다를 꿈꾸네
우린 그곳에 달려가네
이대로 언제까지나
- 페퍼톤스 '라이더스' (2024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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