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부, 쉼표.
J에게.
우리 결혼 10주년. 그 새 우리가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혹시 세어보았어?
정확히 다섯 번인데 지역을 옮길 때마다 나는 지도를 펼쳤지. 여행지를 찾아 나서듯.
첫 번째로 지목한 여행지는 우리의 신혼집이었는데 30년을 살던 복잡한 서울을 처음으로 벗어나, 경기도 광주로 떠났다. 산꼭대기에 있는 10평 남짓한 빌라 4층에 무거운 페인트통을 짊어지고 갓 포장한 따끈한 만두를 들고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더운 줄 모르고 행복했어.
'아무것도 없는 산골'이지만 거실통창을 통해 맞은편 산등성이를 함께 바라보노라면 '아무것도 필요 없는 우리'가 됐었거든.
겨울에 고개에 눈이 많이 쌓이면 버스가 올라올 수 없어 두 정거장을 걸어내려가야 하고 덕분에 겨울에 결혼한 친동생의 결혼식에는 사진도 남기지 못했지. 썰매를 타도 될 만큼 경사진 곳을 올라가지 못해 차를 버려두고 명절 음식을 들고 거의 기어가듯 오르던 날도 하얀 눈만큼 우리의 추억도 쌓였다.
어느샌가 거실뷰를 장식하던 산이 난개발로 난도질당하기 시작했을 때,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지. 우리는 2년 만에 켜켜이 쌓인 추억들을 모두 담아 경사진 길을 내려왔다.
다시 지도를 펼쳤다.
비교적 퇴근 시간이 일정한 너의 직장을 거점으로 '서동탄'역 근처로 정했어. 우스개 소리로 '역세권'이라 했지. 전철은 한 시간에 네 번(그나마도 평일이라 배차간격이 짧은(?)) 남짓 운행하고 집과 역 사이에 논과 밭이 출근길이 되어 주던 곳. 내 회사까지는 대중교통으로 2시간 거리이지만 괜찮아. 여기는 개발되지 않을 것 같거든.
한겨울, 첫째 아이 만삭일 때, 이 고요한 동네 새벽녘 눈님 오시는 소리와 현란한 몸짓을 감상하며 출근길에 영화 철도원을 연상했다. 배차간격이 대략 20분인데 눈으로 더 지연된다는 안내방송의 내레이션도 그저 낭만이었다. 추운 1호선에서 왕복 네 시간을 뱃속에 품은 아이와 함께 행복했어.
가을이면 추수하고 난 논밭에 기러기 떼가 잠시 쉬어 갔지. 정직하고 성실했던 날개가 안착하려는 몸부림과 다시금 대열을 정비하고 비상하는 날갯짓이 곧 가을이었다. 화성시와 안산에 습지가 많다는 것을 안 뒤에 우리는 기러기 떼를 찾아다녔고 궁평항 들어가는 길목에서는 기러기떼를 스토킹 했었다.
이곳에 살면서 우리의 분신인 첫째와 둘째를 만났고 매년 일가족이 기러기를 보러 갔어. 멀리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의 카페에 앉아 기러기 떼의 군무를 보던 그날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선연히 기억하고 있어.
'어쩐지 동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아.'
우리는 2년 뒤 주택 3층에서 바로 아래 2층으로 셀프 이사를 했다.
1층 상가 스튜디오에서는 겨울철 길냥이를 위한 거처를 만들어 두었는데 우리는 상가 직원들과 동참해 여러 해 새끼들을 돌봤었지. 엄마 냥이는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듯해.
새끼 고양이가 차에 치어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걸 발견한 너는 우리 차에 새끼 고양이를 싣고 동물병원을 데려가던 중이었는데 차에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고양이를 묻어주고 왔다 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힐난 어린 질문을 나는 거두고 싶었다. 우리가 돌봤던 새끼 고양이었는지, 로드킬 당한 것을 목격한 뒤로는 TNR을 신청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즈음, 우리는 분양받은 아파트로 네 번째 이사를 했다. 서동탄역에 자리 잡을 때만 해도 동탄역 인근은 허허벌판이었는데, 글쎄 5년 만에 동탄은 우주도시가 됐다.
내 거주지 선택 기준에 아파트는 없었어.
그래도 아파트에서 한 번은 살아보고 싶다는 너의 말. 그 외에도 불가피한 여건들로 우리는 입주를 했지. 아파트는 동탄 끝자락의 야트막한 산 정상에 위치해서 전망이 좋았고 덕분에 시야에 가득 담기는 노을에 걸음이 붙들려 한동안 바라보곤 했다. 겨울이면 슬로프처럼 길게 뻗은 단지에서 눈썰매를 타던 아이들의 왁자한 웃음소리와 힘찬 걸음 소리가 또렷해.
그러나 층간 소음, 벽간 소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까지 이동해서 땅과 하늘 어디쯤에 사는 것은 내가 선호하는 거주 방식이 아니었고, 잘 다듬어진 조경과 인조석은 인공미를 뽐냈지. 단지 내 물놀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면서 래시가드 군데군데 까만 타이어 찌꺼기들이 붙어 있대도, 대한민국에서는 다들 이렇게 사는걸? 그냥 그러려니 했다.
동탄으로 인구가 물밀듯 밀려들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잘 다듬어진 신도시만의 분위기는 나로선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았어. 결국 매일 볼멘소리를 하던 나는 신도시 아파트에서 2년을 못 채우고 다시 지도를 펼쳤다.
이번엔 어디로 떠날까?
시댁에서 아이들을 돌봐주시니 멀리 가면 안 되고, 아파트는 제외하고, 동탄은 아파트가 즐비하고. 아파트에 살던 2년 동안 빨리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싶어 눈여겨봐 두던 동네가 있었는데 오산과 동탄 어디라고 딱 집어 말하기 애매한 골짜기 같은 동네에 소규모의 단독주택 단지가 있었어. 우리는 함께 동네를 둘러봤고 전세를 알아본 뒤 불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이사를 결정했다. 자그마한 텃밭과 불멍 하기 최적의 조건인 테라스, 아이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기본권이 보장된 이곳에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 것이라고 다짐을 했어.
이때는 누구도 몰랐지. 이렇게나 마음에 쏙 들었던 집에서 단 1년만 살게 될 거란걸..
이사한 지 오래지 않아, 나는 대한민국 지도가 아닌 세계지도를 펼쳤다.
여러 이유와 계기로,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국을 뜨자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을 벗어나 있었어.
'우리가 지낼 곳은 대한민국엔 없는 것 같아.'
5번의 이사를 감행하면서도 늘 그렇듯 너는 "그래, 그러자' 했고,
"캐나다로 가자"는 단호한 한마디에도 너는 "그래, 그러자" 했다. 그 한마디에 얼마나 큰 용기와 함께함과 믿음이 응축돼 있는지 나는 안다. 그런 너에게 난 늘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는 반년을 더 준비해 2024년 너의 생일에, 설렘과 긴장과 두려움을 모두 비행기에 싣고 캐나다 시골로 떠나왔다. 내가 우리에게 주는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이자 너의 생일 선물이며, 우리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늘로써 캐나다 시골살이 55일째. 곤히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다시 한번 되뇐다.
'오길 정말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