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브리데이미 Jul 05. 2019

그릇 가게

그릇 가게에 들어서면 그동안 집안의 그릇과 부대끼며 살아왔던 시간이 단지 일상에서 치르는 혼자만의 잡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가에서 전시되고, 돈으로 거래되는 상품으로 편입되는 듯 한 착각이 든다. 그럴듯한 가게에 그럴듯하게 놓인 그릇에 사적인 생활이 투영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 자꾸 들어가서는 아무도 더럽히지 않아 아무런 과거가 없는 새 살림을 구경하고는 한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의 한 라인이 온통 그릇 가게였던 적이 있는데 요새 ‘핫 하다는’ 물건이 재빠르게 구비되어 인터넷에서만 보던 물건을 실물로 확인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름만 들어보고 써보지는 못한 수입 브랜드의 후라이팬이며 일본에서 공수해온 도시락, 아이디어가 빛나는 샐러드 탈수기, 그냥 나가기 섭섭한 김에 사기 좋은 이천 원짜리 냅킨 등. 그릇에 대한 ‘감각’을 키워준 대가로 살림에 대한 욕망을 자극했던 만물상에는 주부들의 연륜 배인 품평이 떠다니고는 했다. 무심한 척 그들이 가리키는 물건을 힐끔 훔쳐보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품평을 주어 듣는 게 거기에 가는 또 다른 낙이었다.    




이건 사봤자 오래 못 써
그거 나르다 손목 나가겠다.
음식은 흰색에 담는 게 제일 예쁘기는 해.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삼만 원짜리 물건이 만 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만 원 짜리 물건이 십만 원어치는 우려 먹을 재산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머물 때 형성되는 위로랄까. 동질감이 묘한 연대를 이루어 서로 인사 한번 하지 않고 지나치는 그릇가게의 쇼퍼들을 위화감 없이 스치게 하는 분위기도 좋았다. 내가 ‘아줌마’라 부르던 사람들은 이제 나의 ‘선배’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하상가에서 살 물건과 아울렛, 인터넷으로 살 물건이 무엇인지를 대강 알고 나름의 분류체계 안에서 쇼핑목록을 나누어 놓고는 가게 경제가 허락하는 한에서 그 비율을 조절하는 베테랑들이었다. 





 지하상가의 분위기와 대척점에 있는 가게는 ‘공방’이나 ‘갤러리’로 불리는 매장이었다. 적극적으로 호객 행위를 하던 지하상가 사장님들과 달리, 이런 가게 주인들은 보기만 하고 사지는 않는 손님에 이력이 난 듯 별다른 참견 없이 자기 일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눈과 귀를 이쪽으로 열어놓다가 가격표를 확인한 손님이 깨질세라 고이 내려놓으면 ‘그럼 그렇지’하면서도 자기 물건에 대한 프라이드만은 놓지 않는 주인들의 자부심이 고요한 공기를 타고 미세하게 전달되었다. 행여나 써보지도 못한 그릇의 값을 물어내게 될까봐 몸짓 하나에도 신경 쓰며 한 바퀴 돌고 나면 진이 빠졌지만 제대로 만든 그릇을 보는 즐거움이 숨막히는 압박감을 보상해주었다.    


 잘 구운 도자기의 매력포인트는 선이었다. 공장에서 획일적으로 찍어내어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매끈한 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진 티가 나는 둥근 선. 살짝 올라갔다가 살짝 내려가는 선의 물결은 자로 재지 않아 반듯하지 않지만 모나게 비뚤지도 않았다. 반듯함과 비딱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예술적 경지를 이루어 단순히 ‘선’이라 부르기에는 그 선이 이룩한 아름다움에 못 미치는 선.     


 우리 집에 들이기에는 너무 고운 선이었다.    


 완벽한 그릇 하나 놓는다고 달라질 집구석이 아니었다. 외려 주위의 물건이 갖추지 못한 결함을 강조하는 바람에 주변의 못난 꼴이 눈에 띌 가능성이 컸다. 이런 가게에 들른 날은 내가 가진 것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무것도 사지 않은 날로 마무리되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싶은 걸 못 가졌다는 결핍감보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는 배부른 감상이 남는 건 왜였을까. 분명 내가 본 건 빈 그릇이었는데. 그릇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풍성한 식탁과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이라 그랬을까.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게 거기에 있다는 존재감만으로 마음이 흡족해진다면 기능을 넘어 우리의 삶에 일부가 되어버린 물건일 가능성이 크다. 그릇은 내가 태어날때부터 보았던 것. 앞에 놓일 때마다 빈 속을 채웠던 공급처였다. 그릇이 불러일으킨 오래된 상념이 마음 속 어딘가 허기진 구석을 채워주었고. 그 채움이 한 그릇 든든하게 밥을 먹은 듯 마음에 차오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살 것도 아니면서 자꾸 그릇을 보러 다니고. 허기진 마음에 밥술을 떠 넣는지도 모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