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나이 0세

연애의 역사 (2)

by 에브리데이미

요새는 초등학생 때부터 연애를 한다던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잘 안 씻고 다니는 더러운 놈, 브래지어 끈을 당기는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좀 짓궂은 장난’이라고 믿는 뻔뻔스러운 변태 놈, 또래에 비해 발육이 빠르고 키가 컸던 나를 ‘돼지’라고 놀리던 찌질한 멸치들이 전부였다. 어디에나 군개일학은 있기 마련이라 정신 나간 개떼들 중에도 키 크고 공부 잘하고 다정한, 연애 한번 걸어볼 만한 사내는 있었다. 반장 같은 녀석들이었다. 문제는 이 반장 놈들에게 나란 여자가 딱히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개떼들을 남자로 안 보고 상대하지 않았듯, 반장들 역시 딱히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얼굴 예쁘장한 애들이나 ‘일진’으로 불리는 애들이 몇 개 안 되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애들 입에 오르내렸다. ‘이쯤이야 뭐, 어디에나 있는 불평등한 애정사’라고 체념하기에는 아직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열세 살. 같은 어린것인 주제에 '어린것들이 까져 가지고 그런다'며 냉소했으나 실은 나도 연애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한 사람이 다 사귀지도 못할 거. 인기남, 인기녀가 독식하지 말고 1인 1 러브 체제로 가면 얼마나 좋아.’


그러나 현실은 남자와 여자의 ‘평등한’ 일대일 매칭 시스템을 따르지 않는 빌어먹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였고 연애를 하려면 ‘자연스러운’ 과정이 필요한 법이었다. ‘끌림 – 고백 – 사귐’의 3단계 중 주구장창 1단계만 쳇바퀴 돌던 나는 본의 아니게 ‘공부만 하는 착실한 모범생’이 되어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하이틴 로맨스의 주인공들 복장대로 교복까지 입었겠다! 이젠 정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지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가 들었으나 교복을 입으면 간지가 나는 건 만화 속 애들 얘기고. 바야흐로 인간이 제일 못생겨진다는 중학생에 접어든 나였다.


‘졸업할 때까지 입으려면 넉넉하게 커야 한다’는 엄마의 지령에 따라 오버사이즈 된 쟈켓을 아빠 옷처럼 걸치고 학교 규정대로 다리 밑 15cm, 종아리가 제일 두꺼워 보이는 위치에 맞춤한 치마를 입으니 이건 뭐. 누군가에게 고백한다면 그 애에게는 꽤 폭력적인 일이겠다 싶을 몰골이 되었다. 여기에 머리 길이는 귀밑 삼 센티. 애들을 최대한 못생긴 꼴로 만들어 놓고 즐기는 사디스트형 인간이 교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혹한 규정이었다. 규정 준수를 위해 덥수룩하게 붕 뜬 머리를 이고 반에 들어서면 여전히 내 어깨만큼 오는 남자애들이 개떼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도 나지만 걔들 역시 함께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고 싶은 종류의 인간은 아니어서 ‘착실하게 공부만 하는 모범생’ 이미지가 중학교에서도 계속될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현실을 포기한 많은 인생이 그렇듯,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나의 낙은 학교 앞 책방에 들러 원수연, 이미라, 황미라 등 90년대의 거장들이 그린 완벽한 연애를 훔쳐보는 것이었다. 만화 <풀하우스>의 그 유치한 대사, “내가 뚱뚱해져도 날 사랑할 거야?”라는 여주의 말에 “당신이 차지하는 세계가 넓어질 테니 더 행복하겠지”라는 남주의 대사에 ‘구라 까지마’라고 비웃으면서도 은근히 진심이기를 바라며 신간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칼라티비가 집집마다 보급된 지 오래된 시절이었다. 진짜 연애는 못해봤지만 드라마에서는 진짜 연애 같은 연애가 밤 10시마다 SBS에서도 나오고 MBC에서도 나왔다. 남녀 간의 사랑을 스토리라인의 주축으로 한 드라마에서 연인들은 사소한 오해로 싸웠고, 매몰차게 배신했으며 가슴 찢어지게 이별했다. 연기파 배우가 혼신의 열연을 다하는 씬에서는 연애 한번 못 해본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청춘의 덫>의 심은하는 자기를 버린 남자에게 처절한 복수를 완성했고, <가을동화>의 송혜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슬퍼하다 송승헌 등에 업혀 죽어갔다. 하루 종일 뱃살을 조여오던 교복 치마를 훌렁 벗어던지고 고무줄 바지로 갈아입은 채 심은하가 되고 송혜교가 되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삼시세끼 밥은 열심히 챙겨 먹는데 노동으로 배출되지 않아서일까. 쏟을 수 있는 눈물과 감정이 참 많던 시절이었다.



사랑을 해보기 전에 사랑의 아픔을 먼저 배웠다. 열네 살에 사랑을 알고 열다섯에 이별을 겪고 열여섯에 배신과 불륜에 정통해 있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근거한 슬픔이었으나 뭐라도 해본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사랑, 그거 다 부질없다’고 뇌까리고는 했다. 겉늙은 입방아와 달리 실제 연애 나이는 0세. 경험 전무한 모솔이었다. 연애든 뭐든 빨리 해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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