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브리데이미 Aug 06. 2019

주부가 되었으나
여전히 멋 부리고 싶다.

옷을 살까 말까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될 고민거리.    


 ‘옷을 살까 말까?’    


 반복적으로 기습하는 충동에 떠밀릴 때마다 즐거운 숙제를 안은 기분으로 인터넷을 뒤지거나 쇼핑몰을 헤매고 다녔다. 답을 찾는 게 아쉬워 일부러 빙 돌아다니며 옷 한 벌 사겠다는 핑계로 수십 벌의 옷을 구경했다. 도시에는 욕망의 주기를 불필요할 정도로 앞당기는 볼거리들이 흔했다. 스마트폰에 지친 눈을 무심코 풀어 놓고 있으면 동공을 조이는 뭔가가 걸려들기 마련이었다.     


 다양한 색의 완벽한 조화, 탁월한 질감, 센스 있는 믹스매치.    


 잡지 화보에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모델이 궁극의 미를 연출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각자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요령껏 멋을 부린 이들이 현실적인 스타일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때는 그들과 똑같아지기 위해 애쓰다 결국은 절대 똑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좌절하던 나날도 있었다.    

 


 옷이 한 인간을 대변하는 절대적인 표상이라 믿었던 열네 살의 나는 남자애들이 이제 막 싹튼 성욕에 몸부림치듯 이제 막 싹튼 소비욕구에 쩔쩔 맸다. 당시의 나는 인생 어느 때보다 옷에 대한 욕망이 컸음에도 인생 어느 때보다 돈이 없었다. 엄마를 졸라 타낸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손에 쥐고 명동 거리의 싸구려 옷에 환장하는 게 할 수 있는 쇼핑의 전부였다.    


 이후 옷에 대한 열정은 점차 줄었으나 습관처럼 배인 소비생활 덕에 많은 옷을 사고 버렸다. 재질이 멀쩡한데도 어쩐지 손이 안가는 물건을 하나, 둘 가차 없이 정리하기도 했다. ‘이거다’ 싶어 집었던 손으로 ‘아니다’ 싶어 폐기처분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스스로의 안목이 의심스러워졌다. 확신에 차 계산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입고 나가기조차 민망한 옷 쪼가리만 남았으니 변덕스러운 취향이 언제 또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차츰 변화의 중심부를 위한 민첩한 노동에 회의가 들었다. 인싸인 척 하기 위해 날 서 있던 예민한 촉수가 피로해졌다.    

 

 자아의 축을 형성하던 스타일이란 게 나란 존재의 영역에서 차츰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옷 보다는 내 몸이 먼저고, 스타일보다는 휴식이 중요해진 서른 다섯. 어쩌다 쇼핑에 나서더라도 손에 쥔 것보다 괜찮은 게 있는데 모르고 놓쳤을까봐 안달하지도 않고 발이 부어 가는데 보고 싶은 게 많아 무리해서 걷지도 않는다. 마음에 꼭 드는 옷을 발견할 때의 흥분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설사 못 사더라도 심하게 안타까워하지 않고 곧 잊어버린다. 사춘기 시절에 비하면 옷에 관해서는 거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수준. 사사로운 물욕에서 벗어나는가 싶어 대견스러웠다가도 ‘이게 바로 나이 든다는 건가?’ 싶어 씁쓸하기도 한 오묘한 분기점을 맞이했다.    


 지금의 여유를 얻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때론 그때가 그립다. 


한철 유행 따라 만든 조악한 재질의 치마 한 장을 들고 대단한 아름다움을 소유한 냥 들뜨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대충 속아주는 게 아니라 진짜 속아 넘어간 대가로 얻었던 만족과 허영은 경험치 부족의 어리석음이기도 했지만 청춘의 특권이기도 했다. 만 원 짜리 티셔츠 하나로 뭔가가 바뀔 거라 믿었던 이십대의 나. 그런 걸 입고 다니면 한눈에 싸구려인 줄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걸 모르고 돌아다녔던 시절의 나로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다.    

 


지금의 나는 길거리에서 파는 만 원짜리 티셔츠에는 만족할 수 없는 주제에 성에 차는 브랜드를 지를 용기도 없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놓인 흔한 소비자가 되었다. 어쩌면 유혹당할 만한 물건 앞에서 쉽사리 혹하지 않는 건 잠재의식의 방어기제가 생존욕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밖에 나가 사람 만날 일이 얼마나 된다고 옷에 돈을 들여.’    


 집값과 노후자금, 몇 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될 교육비를 생각하면 알뜰살뜰 살림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물욕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더 크고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욕구로 탈바꿈했을 뿐이다. 내 집 마련에 대한 꿈, 안락한 노후에 대한 소망, 자식이 출세하기를 바라는 욕심. 그러고 보면 옷 한 벌을 소망할 때의 욕망은 어리숙하고 순진한 편이었다. 지금의 욕망은 철저한 계획과 치밀함, 현실 인식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어른의 욕망, 세상 물정 아는 욕망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어른들 세계의 그 지루하고 반복적인, 자기검열의 일상이 지겨울 때면 다시금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한 번씩 일탈처럼 저지르는 쇼핑은 어릴 때처럼 어른 흉내 내고 싶은 막연한 동경심이 아니라 과거의 실수를 속속들이 알지만 알면서도 일부러 반복하는, 회귀 본능이 발동하는 어리광이다.    

 

 마음껏 어리광 부리고 싶은 와중에 끼어드는 양심의 소리는 출퇴근하는 남편과 등원하는 아이 옷 대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내 옷에 대한 당위성이다. 내 걸 사려면 현실에 눈감을만한 ‘뻔뻔함’이 필요했고 옷 한 벌 사는 일에 ‘뻔뻔함’ 씩이나 필요하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고는 했다. 가족의 몫에는 관대하면서 개인의 몫에는 인색해지는 낌새가 어쩐지 우리 엄마 같아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놀라 지르는 비명이 ‘흠칫’이었다.    


 맞벌이로 일하며 살림과 육아를 책임지면서도 평생 자기 옷 하나 사는 일에 엄격하던, 모성애와 독한 근성으로 단호하게 여성성을 거세했던 삶. 전적으로 존경하지만 내심 두려워했던 엄마의 삶과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개인’의 물건에 돈을 지불하고 나면 한줄기 불편한 죄책감이 찾아왔다. 불편함을 지우려면 합리화가 필요했다.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의 비용을 돈으로 환산한 후 ‘이 정도는 가질 자격이 있다’는 보상심리로 재빨리 다독여야 했다.    



 남편과 아이 몫으로 옷에 대한 관심을 한 지분 떼어 놓았지만 패션계의 중추인 여성 의류가 계절 따라 변하는 추세에는 여전히 관심이 많다. 지나치게 빠른 유행의 속도가 ‘돈을 벌기 위한 패션계의 전략’이라는 비판에는 동의하면서도 세상에 돌고 도는 돈이 어떠한 형태의 아름다움에 투자되고 대중의 심리가 어떤 전략에 호응하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우아함과 디테일한 창의성의 끝판왕. 샤넬 패션쇼


 유행에 둔감한 동네에 있을 때는 ‘아줌마 패션’으로 지정된 티셔츠에 냉장고 바지를 입고 다니다가도. 어느 날 맘먹고 시내로 나가보면 꾸민다고 꾸민 차림이 어딘가 최신의 방식과 어긋나는 것 같아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다. 바람이 시시각각 결을 바꾸는 속도만큼이나 은밀하게 변하는 트렌드를 스쳐 지나가는 여자에게서 발견하면 어느새 나의 꾸밈은 ‘열심’을 감추지 못한, 부자연스럽고 촌스러운 노력 같아 울적했다. 저기 저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인 여자들은 매일 같이 사람 많은 거리를 걸으며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낸 덕에 지금의 ‘꾸민 듯 안 꾸민 듯 멋스러운’ 스타일을 유지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주부 한 사람이 집구석에서 유행에 뒤처진다고 해서 세상의 아름다움까지 퇴보하지 않는다는 것과 도시는 여전히 가열 차게 트렌디 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불안한 동시에 흥미로운 일이었다. 나란 인간은 절대 형무소에 갇힌 죄수들이 입을법한 경제적이고 비인간적인 복장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세상 모두가 칙칙한 유니폼 하나로 버티는 날이 온다면 그 시각적인 공포에 눈이 마를 텐데. 실제 사회는 멋으로 가득하니 그들 곁에 있으면 내 어린애 같은 욕망도 융화되고 한껏 발전시켜도 될 것 같으니까.    


 주부가 됐지만 여전히 멋 부리고 싶었다. 내가 알던 내 모습은 원래 그랬다.                                                                



작가의 이전글 빨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