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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Sep 09. 2019

내 여자의 남사친, 내 남자의 여사친

 ‘어떤 남녀가 친하다’는 상황은 건조한 일상에 흥미로운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자칫하면 조직의 가십거리(김 부장이랑 이 대리랑 그렇고 그런 사이래매?)로 떠돌거나, 학교의 러브라인(너네 썸 타냐? 사겨라! 사겨라!)으로 꼬이기 십상이다. 자유로워진 세상이라고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을 파고드는 집단의 은밀하고 집요한 시선은 여전하다.    


 이런 식상한 분위기에 대한 염증 때문에라도 ‘남녀사이에 우정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긍정하고 싶어진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촉발되는 감정이 사랑과 섹슈얼로만 설명되는 세상은 뭐랄까. 하나의 이념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고 했던 전체주의 국가처럼 인간의 감정을 지나치게 단순화 했다 싶다. 사람을 ‘좌파냐 우파냐’로 구분해 두어야 안전하다고 믿었던 사회처럼 남녀 관계를 ‘친구냐, 연인이냐’의 두 가지 갈래로 명확히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은 이제 좀 후지지 않냐는 반발심 때문에라도 남녀 사이의 우정 가능성을 믿고 싶어 진다.    


 현실적으로도 연애 중이라고, 결혼 했다고 해서 한 남자 여자와만 교류하며 살 수는 없는 세상이다. 직장에 가면 동료와 일해야 하고 모임에서는 지인과 만나게 되며 원래부터 친했던 친구와 하루아침에 손절하기는 힘든 법. 그들과도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온도를 유지하는 법도 처세의 일환일 것이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선’이냐의 기준이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차라리 연인이 명쾌하게 ‘배신’을 했다면 응징의 기회라도 주어질 것이다. 피해자에게 허락된 눈물을 쏟고 명확해진 비극을 받아들인 후 (힘들겠지만) 관계를 정리하면 될 것을. 친구라는 프레임, 우정이라는 틀, 일로 엮인 관계는 뭐라 하기가 쉽지 않다. 괜히 의심했다가 ‘나를 그렇게 못 믿냐’며 도리어 나의 신뢰도를 역조사 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연인이 나와 싸우면서까지 지키려는 친구가 그에게 대체 어떤 존재인지 의심만 커질 뿐이고. 왜 제 3자 때문에 우리 관계가 틀어져야 하나 속이 상한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연인 곁에 머무르는 이성이 예쁠리는 없다. ‘남사친, 여사친’이라는 명함이 본인들에게는 ‘절대 아무 짓도 안 할 사이’라는 보증수표인지 몰라도 옆에서 속 끓이는 애인에게는 내 사람의 감정을 은밀하게 도둑질하는 위장전입 같은 단어로 들릴 뿐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체 하는 걸까.    




 남녀 사이의 문제를 호언장담하는 이들의 단골멘트가 있다.    


 ‘쟤한테는 진짜 아무 감정 없어요.’    


 나에게는 종종 이 말이 ‘나는 내 발기의 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문장처럼 허풍으로 들릴 때가 있다. 물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자기 감정에 배신 당해본 경험이 적어 해맑다고 생각한다). 표정과 행동을 보면 썸을 우정으로 가장한건지 사심 없는 친구사이인지가 대충 보이지 않나.     


썸이건 불알친구이건 뭐건 간에 애인이 없다면 그들의 진짜 속내가 무엇이든 크게 상관 없는 일이다. 별다른 감정 없이 만나다 어느날 불꽃이 튀어 애인이 되면 좋은 일이고, 평생 우정으로 남아도 좋고, 잠을 자든 손을 잡든 그들의 문제.


그러나. 애인이 있는 상태라면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에 대해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가까운 애인 사이라고 해도 완전히 다 알 수는 없다. 행동과 표정, 평소의 성격을 근거로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만약 나의 애인이 남사친 여사친에게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한다면? 그 관심과 애정의 출처가 우정인지 사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믿어주는 건 신뢰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더이상 신뢰하지 못한다면 믿음을 잃은 애인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신뢰를 떨어트렸는지 돌아봐야 한다.


 인간이 뭔데 자꾸 믿으라고 하는 걸까?


 본인들의 진심을 빌미로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들고 그로인한 불안함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떠넘기는 건 사랑이 아니라 본인을 신격화 하고 믿음을 강요하는 교주의 시험이나 마찬가지다. 위의 생각과 아랫도리의 행동은 종종 불일치하며 여행과 술, 밀폐된 공간은 우리를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


 감정에는 현재형만 있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과거형도 있고 몇 시간, 몇 일, 몇 년 후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미래형도 도사리고 있다. 지금 당장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는 뜻이며 내 마음은 확신이 있어도 친구의 마음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는 소리다. 어느 날 친구가 대뜸 고백이라도 한다면 내 마음이 어떻게 흔들릴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 세상 많은 연인의 출발은 친구고 지인이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쟤한테는 진짜 아무 감정 없어요’는 어디까지나 현재형으로서만 입증가능한 이야기다.    

 

 

남사친, 여사친은 ‘결백’의 문제가 아니라 ‘배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 선의를 꼭 모든 사람과 공유해야지만 배려인 것은 아니다. 끊고 맺을 줄 아는 것도 배려이며 때론 악의 없는 따뜻함이 누군가를 더 아프게 할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네 마음의 유일한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너의 남사친, 여사친에게는 밀리고 싶지는 않다는 연인의 자존심. 그것도 못 지켜주면서 어떻게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친구 관계를 싹 끊고 상대에게 무조건 맞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내가 남사친, 여사친과 보내는 시간을 연인에게 말할 수 없거나 생략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기만’이라는 것. 지금 하려는 일이 내 연인이 친구와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인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세상은 종종 진실의 힘보다 오해의 힘이 더 세다는 걸 명심해야 남사친, 여사친과 진짜 친구로 롱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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