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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Sep 20. 2019

소개팅에서 까인 날

 연애의 역사 (3)

 사진과는 다른 실물, 핀트 안 맞는 대화, 좀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결말에 실망하다 보면 집에서 늘어지고 싶은 황금주말에 온갖 공을 들인 단장이 허무하고 무색해진다고. 서른네 해 동안 꾸준히 소개팅을 해온 S가 말했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와도 결과는 좋지 않다고 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정색하고 앉아 있으면 말이 무뚝뚝하고 세게 나간다고. 그래서 자꾸 까이는 거 같다고. 지난번에 소개팅한 애가 괜찮았는데 선톡만 날리고 있다고. 아무래도 또 까인 거 같다며 앞으로 당분간 소개팅은 안 할 거라고 선언했다.     


 야, 하지 마. 하지 마. 너는 다른 데서 만나야 진가가 나와.    


 S가 원래는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애인지 아는 터라 안타까운 마음에 혼삿길 막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녀는 신경을 거스르며 기어오르는 애새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다독일 줄 아는 타고난 교육자로 학교에서는 설리번 선생님의 뒤를 잇는 티쳐로 추앙받고 있다. 손재주도 타고나 같은 재료를 쥐어주면 나는 똥을 만드는데 걔는 작품을 빚는다. 일상에서 빛나는 친구의 미덕이 한 시간 짜리 이벤트에 치여 위축될 때마다 속이 상한다.      



 겨우 한 시간이었다.    


 나란 사람을‘외모, 복장, 말, 표정’ 같은 몇 가지 표현력에 의지해 프레젠테이션해야 했던 시간은 그동안 살아온 수만 시간에 비하면 극히 짧았다. 살아온 삶이 얼마나 입체적이었는데. 납작한 평면의 카페 테이블 위에서 제대로 설명될 리가 있나. 그러니까 자꾸 억지로 아이스브레이킹 하려다 분위기만 어색해지고 쇼맨십을 부리려다 원맨쇼를 하게 되는 거지.     


 소개팅에서 거부당하는 타격은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또 얼마나 은근히 아픈지. 정답이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떤 사람의 애인 자리를 놓고 벌이는 테스트 같은 분위기가 어쩔 수 없이 나의 가치를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러다 상대의 취향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밀려나면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한다. 세상 다른 곳에 내놓으면 꽤 괜찮은 나의 ‘괜찮음’이 누군가와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떨 땐 인류 절반의 이성에게 거절당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객관적으로 내가 별로인가?’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객관화의 오류에 빠져들게 되기도 한다.     


 소개팅에서는 예쁘고, 말 잘하고, 인상 좋은, 단기간에 캐치할 수 있는 장점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말보다는 행동을 잘하는 사람, 마음은 착한데 말이 안 따라 주는 사람, 속이 진국인 사람은 단 한 번의 이벤트 같은 만남이 아니라 일상에서 지켜보며 발견해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장기적인 진가를 헤아리기에는 커피 한 잔의 용량이 너무 적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소개팅에서 까인 자’들을 변론하는 건 나 역시 까여 본 아픔이 있어서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봐야 빛이 나는 사람’은 자기애적인 위로가 강한 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인생 첫 소개팅에서 얄짤없이 까였다. 이런 쪽으로는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그냥 속이 좁은 건지도) 지금까지 추억하면서 꾸준히 기분 나빠하는 나도 참 징글맞게 집요하다.  

   

 그날, 몰 한켠에서 돈까스와 오므라이스를 주종목으로 하는 식당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은 대학생은 할 수 있는 거부의 몸짓을 총동원해 싫은 티를 내고 있었다. 시큰둥한 눈빛, 심드렁한 안색, 자꾸 끊기는 대화. 딱히 물어보고 싶은 것도 없고 길게 대답하기도 귀찮은 기색... 그럴수록 나는 난감해졌다. 이상하다. 집에서 거울을 안 보고 나왔나. 저 얼굴로 여자를 사귀려면 좀 친절하게 굴어야 할 텐데. 무슨 자신감이지. 그 정도로 내가 별로인가,라고 내 탓을 하기에는 상대도 딱히 남 탓을 할 처지는 못 되어 보여 별로인 인간이 자기 분수도 모르는 건가 싶어 남의 인생이 걱정되는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다.


 피차 별로면 카페에 가서 간단히 차나 한 잔 마셨으면 될 걸. 요령 없이 밥을 먹으러 온 게 문제였는지도. 어쩌면 그는 어차피 안 사귈 상대에게 만원을 쓰는 게 아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치사하고 더러워 일주일치 용돈을 털어서라도 밥은 내가 사기로 마음먹었다. 계산을 하려면 일단 밥을 먹어야 했다. 거대한 접시를 채운 오므라이스와 돈까스가 남은 시간의 불편을 예고하고 있었다.    


 조용히 밥이나 먹을 일이지. 소개팅이라는 걸 처음 해보는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소개팅답게’ 보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어른들이 하는 거라면 다 해보고 싶던 시절이었다. 술은 대학생이 된 사촌언니를 꼬드겨 한 잔 해본 적이 있는데. 소개팅은 셀프로 할 수 없어서 아는 오빠를 조르고 졸라 간신히 마련한 자리였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디 가서 ‘나 소개팅해봤어’하고 운을 띄울 정도의 에피소드는 남겨야 한다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리를 굴리다 소개팅하면 역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당시 유행하던 ‘자기소개 백문백답’의 질문 목록을 생각나는 대로 훑었다. 가족관계를 물어볼까 , 좋아하는 색깔을 물어볼까, 잘하는 요리를 물어볼까 하다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내게 되었다.    


이상형이 누구예요?  


 이성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는 간접 어를 통해 연애의 가능성을 재보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 건 맹세코 소개팅남을 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소개팅다운 연출을 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한 컨셉을 잡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질문은 확실히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무료하게 숟가락질을 하던 대학생은 이참에 쐐기를 박아야겠다 싶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잘 되었다는 듯, 짓궂은 낯빛으로 약간의 조소를 띄며 말했다.      


 빅토리아 베컴 같은 섹시한 스타일을 좋아해.    


 유독 ‘섹시’ 쪽에 힘을 준 답변이었다. 이거 참.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내민 손바닥에 주먹이 날아온 기분이군. 머릿속에 빅토리아 베컴의 군살 하나 없이 마른 몸매와 까무잡잡한 피부가 떠올랐다. 식당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빅토리아 베컴의 유전자와 99.9% 불일치합니다’ 판정을 받을만한, 매우 나다운 모습이었다.     


 나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건 내 문제고.     


 왜 하고 많은 연예인 중에 굳이 눈 앞에 있는 여자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여자를 꼽았을까? ‘나는 너가 별로야’의 완곡한 표현일까? 별생각 없이 한 말에 혼자 열등감을 느끼는 걸까? 꼬아서 생각하지 말아야지 싶었으나 왠지 기가 죽고 말았다. 지금이었다면 “그게 고등학생 앞에서 할 소리냐? 본인은 세상 재미없게 생겨가지고 어디서 섹시를 찾아.”하고 말았을 텐데. 인생 첫 소개팅에 나간 나는 거부를 당한 게 내 죄라도 되는 양 풀이 죽고 말았다.     


 그리고 좀 억울하기도 했다. 나도 그쪽 별룬데. 티 좀 팍팍 내드릴 걸.


 후회가 들었을 땐 이미 밥을 다 먹어치운 뒤였다. 이제와 밀어내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뭐해 남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다며 일어서려 했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는 그보다 반 보 빠르게 계산대로 향했다. 엄마에게 받은 용돈 삼만 원 중 일부를 덜어 카운터 사장님에게 내밀고는 벙찐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도 너 같은 호빗 족 말고 데이비드 베컴 같은 스타일 좋아해,라고 지껄이고 싶은 걸 꾹 참고 안녕히 가시라고 예의를 차렸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깨달았다.


 좋아하던 사람한테 까이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별로라고 생각했던 인간한테 까이면 그게 참 기분 뭣 같다는 걸. 일회용짜리 관계를 위한 밥을 먹으면서 돈까지 내야 한다면 그것 역시 꽤나 억울하다는 것도. 그러니 별로인 사람한테 돈을 쓰면서 까이기까지 한 이들에게는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다는 이유로 나에게는 영원한 악인으로 남았지만. 어설프게 잘해주고 뒤통수를 때리는 스타일에 비하면 차라리 효율적인 배려를 베푼건지도 모를 그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는 좋은 친구이자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은 서로를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는지도 모른다. 밥 한번 먹고 헤어진, 섹시하지 않은 여자와 호빗족을 닮은 남자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인연으로 만났더라면 (여전히 원수일 확률이 높지만) 전혀 다른 관계가 됐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배필을 이어준, 천생연분 찾기의 운명적인 매칭 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만 남겼던 첫 번째 소개팅은 세상의 수많은 소개팅이 그렇듯 씁쓸한 지출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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