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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Oct 10. 2019

나를 아프게 하는 의식, 비교의식

# 박카스로 끼니를 때우지 말자

 요새 나는 뉴스 기사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볼 때면 이름 옆의 가로 칸 안에 써진 나이를 유심히 본다. 어릴 적에는 신경 써서 보지 않았던 부분이다. 초등학생 때의 나에게 어른이라면 다 같은 어른이지 삼십 대 중반이거나 사십 대 후반이라는 숫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먼 훗날, 내가 닿을 수도 있을 고지를 점령한 영웅들을 우러러보며 한껏 가슴을 넓히고 꿈을 키우면 그만이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졸아들었다. 나도 모르게 이름 옆, 가로 칸의 숫자에 민감해졌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꿈의 마지노선을 연장받은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중요한 건 저들이 내 나이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일 텐데. 당장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 꿈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른 중반이 되어가자 또래들이 하나, 둘 뉴스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공한 사업가, 세계적인 학자, 천재적인 예술가 등등.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이십 대의 도전과 실패를 밑거름 삼아 성공을 거둔 이들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는 시기인 것 같았다. 어릴 적, 누군가를 동경했을 때는 나도 노력하면 저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를 다른 열정으로 살아온 이들을 보면서 이젠 그때를 놓쳐 버렸다는 좌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상실감은 나이 탓으로 이어졌다.    


 ‘이 나이 먹도록 뭐했냐.’


 이럴 때의 나는 꽤 가혹했다. 과거의 기억을 들추며 채찍질할 거리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냈다.   

  

 ‘봐봐. 이러니 네가 이 모양지.’    


 죄책감에 사로잡혀 깊은 우울감으로 빠져들었다. 행복할 자격도 없다는 듯이. 구석에서 쭈그리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듯이 위축됐다.     


 생각해보면 나도 뭐 그렇게 막살지는 않았는데. 나를 칭찬하고 인정하는 게 못난 변명이 되어버릴까 봐 남들의 주목을 끌만큼 잘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못 살게 군다. 좀 못한다고 해서 못살게 구는 거. 그건 누구에게도 허락된 권리가 아닌데. 내가 나한테 그러면 진짜 믿을 사람 하나 없는 배신이 되는 건데.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사회가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취직 못한 청년에게, 돈 못 버는 어른에게 대하는 방식대로 나를 대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려고 한다.



 자꾸 성공한 사람들의 기사 같은 걸 클릭하는 이유도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긴장감을 잃고 뒤쳐질까 봐서다. 비교의식이든 열등감이든 동력이 되어 어떻게든 결과적으로 성공만 하면 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얻은 성공은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고를 만족시키지 못할 테니까. 열등감을 자극하며 괴롭히는 병적인 쾌감을 체험하기 위해 더 잘난 사람과 비교하며 더 높은 단계의 성공을 바랄 것이다. 지난 인생을 뒤돌아보면 그런 식의 마인드로 진학과 취업, 결혼과 출산을 해왔다.


 삶에 대한 개인의 철학은 부재한 채, 철학의 빈자리를 성공신화 혹은 사회적인 의미의 생존본능으로 채우며 버텨왔다.    


 주위 사람을 곁눈질하며 일정한 눈금을 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태도.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면 안심해버리고 안심하면 뒤쳐질까 봐 두려워하는 태도로 한 번뿐인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나의 인생을 세상의 눈금을 위해 바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막사는 게 아닐까.


 비교의식과 서열 짓기를 ‘동기부여’라고 포장하면서 나를 키우는 병적인 원동력으로 삼는 건 마치 몸에 좋지 않은 자양강장제를 섭취하는 것과 같다. 루즈해지는 삶의 텐션을 잡는데에는 단기적으로는 유용할지 몰라도 남용하면 장기적인 성장에는 해를 입힌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자양강장제 수준으로 섭취해야 할 이 의식을 커피처럼 자주 들이킨다는데에 있다.


  자양강장제를 장복하면 결국에는 건강을 해치듯,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자기를 태우는 주된 연료로 삼아 버리면 장기적으로는 정신건강을 해치고 만다. 일의 성과만큼이나 나의 성장도 중요하다는 걸, 둘은 겹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다른 영역이기도 하다는 걸, 내 몸을 사랑하는 사람은 박카스로 끼니를 때우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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