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versity of Toronto
사방에 높고 반짝이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시 한 가운데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벽돌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다.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증명하듯, 건물 구석구석은 까맣게 변색되어 있고 모퉁이 군데군데 벽돌은 조금씩 닳아 없어진 모습이다. 이렇게 시간이 남긴 흔적이 모이고 쌓여 있지만, 건물은 오히려 중후한 무게감을 뿜어낸다. 그리고 주변에 잘 조성된 정원과 깨끗한 도보, 넓은 잔디밭이 낡은 건물과 대비되고 또 어우러져 이질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이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이곳 토론토 대학교의 낭만을 완성한다. 대학 캠퍼스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추억에 젖게 되는 모습이다.
“얘네는 캠퍼스를 이렇게 잘해놓고 왜 술은 못 마시게 하는 걸까?”
해가 중천에 뜬, 저녁 시간이 되려면 한참은 남은 낮 3시였지만, 술 생각에 시간은 관련이 없다는 듯 형일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캠퍼스에 대한 감상으로 볼 수도 있는 말이지만, 산통 깨는 소리로 들은 준호가 이어서 말했다.
“이걸 보고 생각나는 게 술밖에 없냐. 너 그 정도면 진짜 중독이야, 형일.”
“근데 너도 생각했잖아. 이 잔디밭을 보고 막걸리 생각이 안 났다고? 해 지고 밤에 10명씩 모여서 술 게임하는 생각 안 난다고? 진짜로?”
“나긴 해.”
형일의 추궁에 준호가 한발 물러서 수긍했다. 20살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대부분이 음주로 점철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 사람은 아쉬운 대로 탄산음료를 대신 마시며 토론토 대학교의 잔디밭을 즐겼다. 주변이 탁 트인 잔디밭에는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적당히 웅성대는 소리가 기분을 편안하게 만든다.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지니, 준호가 다른 두 사람에게 다음 일정을 물었다.
“우리 여기 있다가, 캠퍼스 한 바퀴 걷고, 저녁 먹으러 가는 거야?”
“그렇지?”
“저녁 먹으러는 어떻게 가?”
“글쎄? 아직 안 정했는데?”
태영의 대답에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준호는, 반쯤 뒤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뒤를 돌아 태영을 보고 말했다.
“그럼, 지금 찾고 있는 거야?”
“아니지. 봐봐라, 우리가 여기 와서 오랜만에 캠퍼스를 즐기고 있잖아? 저녁도 이거의 연장선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그래서, 조금 이따 애들 많이 지나다닐 시간에 아무나 붙잡고 식당 추천 받아서 가려고. 현지 대학생들이 많이 가는 맛집. 진짜 현지 투어 아니겠냐 이게.”
“오…”
신나게 설명하는 태영의 옆에서 형일이 눈을 반짝이고 있다. 아무래도 형일이 낸 아이디어인 듯했다. 그럴싸한 설명에 준호는 내심 솔깃했다. 제법 그럴싸한 아이디어였고, 현지인과의 인터뷰는 유튜브 영상에 자주 나오는 컨텐츠이니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하루의 일정과 계획을 두 사람에게 맡긴 준호는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조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야 근데.”
괜히 긴장되게 하는 문장의 시작에 형일과 태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녁 메뉴는 여기 애들한테 물어보고, 이동은 전부 버스 타고”
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형일은 갑자기 잔디를 뜯기 시작한다.
“카사 로마랑 토론토 대학은 내가 알려준 거고”
“캬, 카사 로마 진짜 멋있지 않았냐?”
형일이 말을 돌리려 시도했지만, 준호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점심은 지나가다가 좋아 보이는 데 그냥 들어갔잖아? 그럼, 너네가 계획한 건 뭘까 오늘?”
준호가 두 사람에게 하루의 계획을 맡긴 건, 동선을 파악하고 버스 시간이나 식당을 미리 알아보며 하루의 일정을 만들어 보라는 의미였다. 그런 일을 잘 못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여행지도 겨우 두 가지만 골라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여행지가 서로 가깝다는 이유로 버스는 알아보지도 않고 종일 걸어서 이동했고, 식당은 지나가다 좋아 보이는 곳을 계획 없이 들어갔다. 심지어…
“심지어 길도 잘못 들어서 아주 그냥 토론토를 한 바퀴 돌았지? 오늘? 어제 둘이 뭐 얘기하더니 뭔 얘기를 한 거냐? 뭐, 에스파 뮤비 봤어?”
“어, 어떻게 알았…”
“몰랐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미친놈아!”
안해도 됐을 말에 준호가 결국 큰 소리를 냈다. 그렇게 시작한 큰 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태영이 급하게 준호를 말리며 말했다.
“야, 그래도 재밌지 않았냐? 시내 구경도 하고 뭐, 고기파이도 맛있었잖아?”
“그렇긴 한데, 아니 그렇긴 한데가 아니지. 그럴 거면 결국 그냥 즉흥 여행인 거잖아, 지금. 오늘 목적이 그게 아니었다고!”
“아잇. 재밌었으면 됐지! 야, 산책이나 가자. 여기 한 바퀴 돌아봐야지, 빨리.”
“그래, 한 바퀴 돌면 수업 끝날 즈음 되겠다. 가자!”
형일과 태영이 급하게 일어났다. 준호는 오늘도 씩씩대며 결국엔 앞서 출발한 형일과 태영을 결국 쫓아가기 시작했다.
“저렇게 화가 많아서 어떡하냐, 쟤는. 클라이언트들한테 열받아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대.”
“안 들리게 말하라 했다 형일.”
“들었어? 그럼 들은 김에 대답을…”
달려오는 준호를 피하느라 형일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고, 홀로 남은 태영은 이 머나먼 곳의 대학생들에게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에 두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