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9] 재밌었으면 됐지 2

University of Toronto

by 자두와두

넓은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여기저기서 강의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남자 둘?”


형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백팩을 멘 두 명의 남학생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 명은 백인, 다른 한 명은 동양인처럼 보였다.


“오 좋아. 쪽수도 우리가 많다.”

“우리 싸우러 가는 거야, 태영?”

“혹시 모르잖아. 일단 가자.”


뭘 혹시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태영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앞장서서 두 학생에게 다가갔다. 형일과 준호도 뒤따라 붙었다.


"저기요, 실례합니다. 저희 여기 여행 왔는데, 혹시 이 근처에 펍 추천해 줄 수 있어요? 여기 학생들이 자주 가는 곳으로요."


태영이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두 학생은 잠시 멈춰 서서 세 사람을 바라봤다. 백인 학생이 먼저 대답했다.


"아, 펍이요? 여기서 두 블록 가면 Fox and Fiddle이라고 있는데, 거기 괜찮아요. 학생들 많이 가는 곳이에요."

"감사합니다. 걸어갈 만한가요?"

”네, 금방이에요. 저쪽으로 가다가 두 번째 길에서 왼쪽으로 돌면 돼요.”


동양인 학생이 거들어 설명을 보탰다. 그런데 백인 학생이 잠시 동양인 학생과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사실 저희도 지금 거기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같이 가실래요? 길 안내해 드릴게요.”


태영이 뒤를 돌아 형일과 준호를 보았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고, 형일은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두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태영이 다시 학생들을 보고 말했다.


“오, 좋죠! 바로 갈까요?”


갑작스러운 현지인의 동행에 기분이 좋아진 세 사람은 학생들의 안내에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저는 라이언이고, 여긴 케빈이에요.”

“오 라이언. 전 태영이고요, 여긴 형일, 준호예요."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이요. 여행 중이에요.”

"오, 한국! 좋네요. 여기는 며칠이나 계세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와, 아쉽네요. 토론토 아일랜드 가봤어요? 안 가봤으면 귀국 하루 미루는 게 좋아요. 거긴 꼭 가봐야 하거든요.”

“다행히 안 미뤄도 되겠네요. 어제 가봤거든요!”


짧은 대화를 나누며 10분쯤 걸었을까, 빨간 벽돌 건물에 여우 그림이 그려진 간판이 보였다. The Fox and Fiddle이라는 이름처럼 아기자기한 외관의 펍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어두운 조명 아래 나무 테이블이 빼곡하게 놓여 있고, 곳곳에서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여기예요. 토론토에서 제일 맛있는 윙 파는 곳이에요.”


라이언이 자신 있게 말하며 한 테이블로 안내했다. 다섯 명이 자리에 앉자, 곧바로 웨이터가 다가왔다. 라이언과 케빈이 익숙하게 맥주와 치킨윙을 주문했고, 세 사람도 따라서 주문했다. 맥주가 나오자 라이언이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다섯 개의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첫 모금을 마신 뒤, 케빈이 물었다.


"토론토는 어때요? 아일랜드는 갔다고 했고, CN 타워는 갔어요?”

"어제 갔어요. EdgeWalk도 했고요.”

"헐, 미쳤네. 전 절대 못 해요.”

"우리 중에 한 명은 거기서 거의 울었어요. 누군지는 말하지 않을게요.”


태영이 준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말했다. 준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태영을 째려봤다.


"야 민형일, 넌 거기서 떨어질 뻔했잖아. 줄 잡고 난리였으면서.”

"그건 사진을 위한 포즈였잖아. 카메라 없이 주저앉은 거랑은 다르지 않은가요?”


형일이 라이언에게 설명했다. 분해하는 준호를 향해 라이언과 케빈이 웃으며 말했다.


“진정해요. 제 동기는 정말로 잠깐 기절하기도 했었어요.”

“쟤도 우리 모르게 기절했다 일어난 걸 수도 있어요.”

“하, 너부터 기절시켜 줘 진짜?”


다섯 명이 조금 친해진 사이에 치킨윙이 나왔고, 라이언이 장담한 대로 정말 완벽한 치킨 윙을 먹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벌써 맥주 한 잔을 비운 케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국에 치킨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여기랑 비교하면 어때요?”

“느낌이 다르긴 한데, 여기 윙도 너무 맛있어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요? K-pop 같은 거?”

"K-pop은 좀 알죠. 한식도 좋아하고요. 사실 전 한국계 캐나다인이에요. 부모님이 서울 출신이시거든요.”


케빈이 말했다. 그제야 세 사람은 케빈이 왜 동양인처럼 보였는지 이해가 됐다.


"그럼 한국말 할 줄 아세요?”

"아뇨, 못 해요. 알아듣는 건 조금 되는데 말은 못 하죠. 부모님이 가르치려고 했는데…"


케빈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라이언이 케빈의 어깨를 툭 치며 놀렸다.


"얘는 그냥 백인이에요.”

“조용히 해라.”


두 번째 맥주가 나올 즈음, 형일이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둘은 몇 학년이에요?”

"4학년이요. 다음 학기에 졸업해요.”

"오, 미리 졸업 축하해요! 전공은 뭐예요?”


형일의 너스레에 라이언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경영학이고, 케빈은 컴퓨터 공학이에요.”

"오, 저도 컴퓨터 공학 나왔어요!”


반가워하는 준호의 말에 케빈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진짜요? 지금 뭐 하세요?”

"프리랜서 개발자요.”

"오, 멋있네요. 저도 그거 해보고 싶은데, 어때요?”

"음... 힘들어요.”


준호의 솔직한 대답에 케빈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자유롭게 일하는 거 아니에요?”

"자유로운 건 맞는데, 혼자 하니까 좀 외롭고 돈 벌기도 좀 힘들어요.”

“아..."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형일이 끼어들었다.


"저는 회사 다니다가 관뒀어요. 회사도 힘들어요.”

"왜요? 뭐가 힘들었어요?”


라이언이 물었다. 형일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대답했다.


"야근이요. 한국은 야근이 진짜 많은데, 그 회사가 특히 많았어요. 주말에도 일하고. 그러다 보니까 미치겠더라고요.”

"아, 그건 저희도 걱정이에요. 졸업하면 다들 그렇게 산다던데.”

"맞아요. 다들 그래요. 근데 어쩌겠어요.”


태영이 말했다. 라이언이 물었다.


"그럼 태영은 뭐 하세요?”

"저는 강사요. 수학 가르쳐요.”

"오, 그건 어때요?”

"그냥 그래요. 돈은 괜찮은데, 제 적성은 아닌 것 같아요.”


태영이 솔직하게 대답하다 괜한 소리를 했다 싶었는지 황급히 케빈에게 물었다.


"근데 컴퓨터 공학이면 취업 잘되지 않아요?"

“아니요. 요새 캐나다가 취업하기가 너무 어렵고, 집값도 너무 비싼데 졸업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국이랑 똑같네요. 저희도 비슷하거든요."


케빈의 대답에 준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히 무거운 분위기가 되는 게 어색했던 형일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했다.


"근데 라이언, 여자 친구 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이언이 당황하며 웃었다.


"아뇨, 없어요. 왜요?”

"그냥요. 케빈은요?”

"저도 없어요.”


케빈이 멋쩍게 웃자, 준호가 형일을 타박하며 말했다.


“왜 물어봐 그런 걸.”

“아니, 없는 줄 알았나 뭐. 잘생겨서 있을 줄 알았지.”

“괜찮아요, 그만 싸워요.”


케빈이 중재하며 말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이야기를 나누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일정이 있다는 핑계로 먼저 나가기로 했다. 계산은 각자 했고, 밖으로 나와 간단히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재밌었어요. 잘 가요!”

"졸업 잘하세요!”


라이언과 케빈이 손을 흔들며 펍으로 다시 들어갔고, 세 사람은 숙소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다가 형일이 입을 열었다.


"재밌었다, 그치?”

"그러게. 이런 것도 재밌긴 하네. 라이언이랑 케빈 착하더라."

"맞아. 재밌었으면 됐지 뭐!"

"그 말을 내가 해야 하지 않냐?"


준호의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조용히 걸었다. 태영은 오늘 저녁을 떠올렸다. 낯선 나라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맥주를 한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한국에선 절대 없었을 일이라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9화[Episode 9] 재밌었으면 됐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