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살피는 마음에서 출발하고, 살피는 마음으로 끝나야 한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다 나아지더라. 난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다." 혹은 "나도 그런 일 있었는데, 별거 아니더라." 같은 말들을. 아니면 이럴 때는 무관심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말로 상대의 아픔을 그대로 둔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성급하게 해답을 건네려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위로라기보다 회피에 가까웠다. 상대의 아픔 앞에서 느끼는 나 자신의 불편함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위로는 어떻게 하는 걸까? 대부분의 괜찮다고 생각하는 위로는 살핌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살핀다는 것은 단순히 지켜본다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오직 상대에게 내 마음을 머무르게 하는 일이다.
상처 입은 그의 침묵을 함께 견디는 일이다. 성급하게 "이렇게 해봐"라고 조언하지 않고, "그랬구나" 하고 그저 듣는 일이다.
상처는 해결되기를 원하기보다는, 이해받기를 더 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눈 뜨는 순간부터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얻는다.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에 마음 한구석이 베여 짓무른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위로의 말보다 내 아픔이 아픔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이 위로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은 얼핏 위로처럼 들리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네 아픔은 아픔도 아니야"라는 메시지로 전달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처의 크기를 재는 것은 그 상처를 입은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타인이 함부로 "별것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베임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 있다.
살핌은 지속을 뜻한다. 상처가 아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듯 한 번의 위로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와닿지 않을 수도 있고, 내일의 침묵 속 동행조차 거부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위로하고자 한다면 적당한 거리에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꾸준한 관심, 지속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이 위로가 통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위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자신 없으면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필요한 건 진정성이다.
그 진정성을 상처받은 이가 느낄 수 있어야 위로가 된다. 아무리 좋은 말도 받는 이가 위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없다. 위로하는 사람 역시 지치고, 때로는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진심 어린 위로를 하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 머물러 살피는 것이다. 완벽한 답을 주지 못해도 괜찮다.
결국 위로는 살피는 마음에서 출발하고, 살피는 마음으로 끝나야 한다.
상대의 아픔을 나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고, 그의 마음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것.
상처는 빨리 아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아물어야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