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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

선택할 수 없었던 어린 날들

by 재비




" 와 거기 부산에서 엄청 유명한 베이글 집이잖아 "

" 그거 네가 만든 거야? "

" 그럼 돈 많이 벌겠네? "

" 스타트업 회사에서 임원이야? "

" 부럽다 "




누군가에게 나의 근황을 얘기해 주면 한 마디씩 얹는 말이다.

딱히 현재를 자랑하려고 시작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룬 것들도 소중하니까 남기고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보면 내가 하나씩 선택해서 만든 결과물이니까.

힘들었던 시절이 여러 번 있었지만, 내가 한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것이 내 신념 중 하나니까.

도전하고, 시작하는 경험을 계속하길 바라며 글을 써본다.




솔직히 말하면 내 어린 시절은 그다지 유복하지 못했다.

요즘에는 성공포르노, 성공팔이라는 말들이 생겨났다.

성공시켜 준다는 말로 공식 같은 게 있다며,

' 본인도 어렸을 때 흙수저, 무(無) 수저였지만 현재 성공했다. '라는 말들로 사람들을 선동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혹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나다.

왜냐하면 성공하고 싶었다. 아니 지금도 성공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 사기 같은 말에도 기꺼이 넘어갈 만큼 어리석었던 내 모습도 있다.


처음에 내가 태어났을 때는 집에 돈이 어느 정도 있었다.

아빠는 사업을 했고, 엄마는 가정주부였다.

그렇다고 원래 집에 돈이 많았냐? 그것도 아니다.

엄마얘기를 들어보면 처음 시댁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 놀랐다고 한다.

아빠집은 너무 가난해서 다리밑 개울가에 거의 쓰러져 가는 판잣집 같은 곳에 살고 있었고,

그때 당시에 있을법한 냉장고도 없었다고 한다.


일찍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빠나이 9살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쭉 할머니가 5남매를 키웠다.

제일 맏이인 고모는 버스안내양을 했었고,

(버스에 사람을 태워주고, 내려주고, 출발 사인인 '오라이!!'를 외쳤던)

둘째인 큰아빠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다가

기회가 닿아 유조선을 타며 돈을 벌게 되었다.

셋째인 우리 아빠는 삼성전관(현 삼성 SDI)이라는 곳에 전기공으로 일할 때였고

큰삼촌, 작은 삼촌은 각각 대학생과 고등학생(차후 군인)이었다.


큰아빠가 탄 유조선이 전쟁국가를 지나다가 배가 침몰했고

다른 사람은 다 구조가 됐는데 큰아빠만 구조가 안 됐다고 한다.

(엄마말로는 큰아빠가 그 당시 집에 돈을 많이 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 보였다고 했고,

고모한테 혹시 본인이 잘못되더라도 보험금이 나오니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기고 배를 탔다고 한다.)

그래서 큰아빠 이름으로 보험금이 나왔는데 그때 당시(1980년대) 1억 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가난하게 없이 살던 집에 그런 큰돈이 생겼으니

할머니는 원래 사고 싶었던 물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자개장롱사고, 집 사고, 옷사고, 원래 돈이 있었던 사람처럼 돈을 썼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본인도 사업을 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싶다고 생각해서 인지

보험금을 나눠 받아서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처음 시작했던 사업은 비디오가게, 파스퇴르 우유 대리점등이었다.

그때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당시 잘되던 가게들을 끝물에 받아서 하게 됐는데, 처음 해보는 사업이라 진행이 잘 안 됐던 모양이다.

그다음에 했던 사업이 무역업이었다.

미국에서 만든 음식물 처리기를 수입해서 꽤 잘됐었다.

할머니 집에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싱크대 밑쪽 배수로에 설치해서 음식물을 바로 싱크대에서 물과 함께 분쇄해

하수도로 흘려보내는 방식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도 되고, 편리했는데

그때 다른 기업에서 그 라이선스를 가져가기 위해서

환경오염 문제로 신문기사등으로 걸어서 아빠 사업이 파산하고 말았다.

결국에는 현재까지도 다른 업체가 시공하고 있다.


아빠가 파산하면서 집에는 빨간딱지가 붙고

할머니, 삼촌들과 같이 살던 집에서

엄마, 아빠, 나, 동생 이렇게 4명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화장실도 밖에 있고, 방 한 칸에 곤로로 밥을 하고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곳으로.

어느 겨울날 새벽에 엄마가 소리치며 동생과 나를 깨웠다.

연탄가스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내복을 입고 밖에서 벌벌 떨면서 환기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날 연탄을 떼지 않고 잠바를 입고 이불 덮고 자야 했다.



아빠는 그 이후로 직장생활을 하지 못했다.

잠깐 택시기사를 하기는 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하게 집이 화목(?)했던 시절이다.)

계속 돈을 어디서, 누군가에게 계속 빌리며

다른 사업 또 다른 사업을 했다.

계속 영업한다고 술 먹고, 집에 안 들어오고, 뭔가 다른 일을 또 시작하고,

그러다 계속 망하고, 파산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남해에서 어장사업도 했다. 물론 얼마가지 못했지만.

집에는 한 번씩 전화가 왔다. '아빠 계시니?'

아빠가 빌린 돈을 주지 않아서 누군가 경찰에 사기로 신고를 해서

형사 2명이 조사차 우리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엄마는 형사분들께 보리차를 내드렸고, 집안 사정을 본 형사들이 그냥 보리차만 먹고 돌아갔다.

보아하니 별로 얻어낼 게 없었던 모양이었다.

돈이 많았던 어느 사모님은 아빠가 빌린 돈 때문에 집에 독촉전화를 계속하다가

같은 여자로서 엄마가 불쌍하다며 동생과 내게 새 옷이랑 고기를 사준 적도 있다.


엄마는 그간 생활력 없는 아빠 때문에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스스로 일을 해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화장품 판매원, 카드영업원, 대출영업원, 백화점 판매사원, 콜센터 직원

부동산 영업직원 등등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일을 했다.

물론 현생에서 풍파를 많이 맞고 힘들었기에 조금은 히스테릭했지만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시작했고, 곧 이혼했다.


아빠는 거제도로 내려가서

철거, 인테리어를 하는 작은 사업체를 꾸리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중

거제도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때 내 나이 21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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