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맛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가난하다는 것을.
물론 밥도 못 먹고 물로 배 채우고,
다 떨어진 옷 입고 다니는 그런 전쟁고아처럼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엄마가 열심히 벌어서 학교에 내는 돈은 조금 밀려도 냈으니까.
집에 과자 몇 개 놔두고 일주일 동안 아껴먹어야 했지만,
밥 먹을 때도 7첩 반상은 아니지만 때마다 김치 담가서 먹을 수 있었고
소시지나,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넣은 것도 한 번씩 먹었다.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먹고 산다고 해서 뭐든 괜찮은 건 아니었다.
월세를 전전해야 했고, 몇 년마다 이사해야 했고,
한 번도 '우리'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집도 넓고 과자나 먹을 게 많았는데
그걸 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거였다.
'우리 집은 과자 한번 뜯으면 동생이랑 싸우면서
네가 더 먹었니 내가 더 먹었니 하면서 개수 나눠 먹는데
여기는 과자가 되게 많다... 맛있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은 자기 방도 있고, 침대도 있는데
나는 집에서 좁은 방에 바닥에서 동생이랑 같이 잠을 자야 했다.
그런 비교 아닌 비교를 해가면서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갖고 싶었다.
내방,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과자, 침대, 좋은 집, 화목한 가정
그런 것들을 가지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부터 중학교 올라가서 까지 매일 500원씩 용돈을 받았다.
일주일이면 3500원이었는데, 문방구 앞에서 불량식품 몇 개 사 먹을 돈은 되지만
유행하는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는 데는 부족한 돈이었다.
떡볶이 1개 먹으면서 어묵국물 3~4번 퍼마시고
떡볶이 소스에 있는 당근이나 야채 같은 거 눈치 보며 건져서 먹었다.
야채는 싫었지만, 그 소스라도 먹고 싶었다.
떡볶이도 계속 씹으면서 입안에서 액체가 될 때까지 만들어 삼켰다.
그래야지 맛을 오래 느낄 수 있으니까.
용돈을 아껴서 학교 앞에서 파는 1,500원짜리 최신가요 테이프를 샀다.
안에 내가 좋아하는 곡이 많은 걸로 고르고 골라서 산 테이프를 자주 들었다.
나중에 좋아하는 가수의 정규 앨범 카세트테이프는 5,500원 정도 했는데
2주 동안 안 먹고 안 쓰고 구매를 했다.
가사를 외우고, 숨소리까지 외울 것처럼 듣고 또 들었다.
돈은 없었지만 낭만은 있었다.
근데 돈도 있고 싶었다.
중학생 알바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한 번씩 가는 PC방이 있었다.
게임을 하던 건 아니었다. 그냥 인터넷 하고, 하두리 사진 찍고.
거기에서 별로 할 건 없어도, 엄마 허락 없이 마음껏 컴퓨터 하는 게 좋았다.
물론 그때 당시 1시간 500원 했었어서 큰돈이었지만..
PC방에 더 있고 싶어서 인상 좋아 보이는 사장님께 물었다.
'혹시 알바 안 구하세요? 저 주말이나 휴일에 알바시켜 주실 수 있으세요?'
안시켜 준다고 하면 일하고 돈 대신 PC방 시간으로 달라고 말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나중으로 미루고 사장님 대답을 기다렸다.
'중학생이야?'
'네. 근데 집도 가깝고, 일 시켜주시면 진짜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그럼 일요일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시간 해줄 수 있어? 시급은 중학생이라 많이는 못주고 2,000원 쳐줄게'
'12시간이요? 네! 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시급 2,000원에 12시간이면 24,000원이었다.
중학생에다, 하루 용돈 500원 받던 내가
12시간에 24,000원을 벌다니. 그 돈으로 뭘 할지 벌써부터 설레었다.
짜장면 먹을지, 피자 먹을지, 떡볶이 배 터지게 먹을지,
하루 더 아르바이트해서 유행하는 힙합바지를 살지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그때 당시에는 PC방에 금연, 흡연 자리도 나눠져 있지 않고
그냥 모든 사람이 아무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울 때였다.
내가 했던 일은
선불하는 사람 시간 넣어주고,
후불하는 사람 카드 바코드 찍어서 시간 넣어주고,
잠시 외출하는 사람 정지 했다 풀어주고,
라면 끓여주고, 재떨이 갈아주고, 손님 나가면 자리 치워주고,
컴퓨터는 만질 줄 몰라서 혹시 에러 나면 자리 옮겨주고.
뭐 그게 다였다.
엄청난 담배 연기와 재떨이 갈아주는 게 제일 싫었지만
돈 벌려면 어쩔 수 없었다.
사장님이 컴퓨터는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해서
사장님 자리에 앉아서 좋아하는 노래 벅스뮤직으로 매일 듣고
세이클럽 채팅하고
그건 정말 좋았다.
그렇게 PC방 알바를 주말, 공휴일에 한 번씩 해서
처음 돈을 받았다.
학교 다니면서 자주는 못했기 때문에
월급으로 12만 원 정도 받았었다.
첫 월급은 엄마한테 빨간색 내복 사주는 거라 했는데
내복은 안 입을 거 같아서 빨간 팬티를 사줬다.
그리고 먹고 싶었던 떡볶이도 사 먹고, 좋아하는 가수 정규앨범도 샀다.
내가 돈을 벌어서 마음대로 쓰니까 너무 행복했다.
돈 없는 엄마에게 눈치 보면서 돈 달라고 안 해도 되고
또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다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빠가 알바를 못 가게 한 거였다.
아빠는 누가 봐도 험상궂게 생겼다.
솔직히 조폭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아니 조폭이 아니라고 하면 안 믿을 정도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컸다.
아빠가 PC방에 찾아와서 사장님에게 나를 데려간다고
있는 대로 인상 쓰고 일하고 있는 나를 데려갔다.
'쪼끄만 게 거기가 어디라고 거기서 일을 하노'
'아 뭐! 피시방이 나쁜 데가?'
'그럼 좋은 데가? 전신에 남자애들 담배 벅벅 피우고 니가 재떨이 갈고 그런 일을 왜 하노?'
'용돈 벌라고 가는 거다!'
'칵! 마! 씰때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지 마라 했다 '
'왜! 용돈도 별로 안 주면서 돈도 못 벌게 하노! '
' 헛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하고 따라 온나! '
정말 이해가 안 가고 화가 나서 집에 와서 엄청 울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하라고 아빠가 소리 질러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다.
그 분노는 쉽게 사그라 들지 않고 며칠을 갔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가 딸이 어린 나이에 그런 일 하는 것도 싫었고,
본인이 생활력이 없어서 그렇게 된 상황에 화가 난 거 같았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나는 알바를 못 가고, 한 번씩 용돈 받아서 PC방을 갔는데
사장님이 공짜로 있게 해 주신 적도 있었다.
그 사장님 되게 좋았는데..
그리고 그때 정말 좋았던 거는 세이클럽별명으로 나를 불러주셨다.
중2병 걸린 나는 세이클럽 별명이 '피로말린장미'였다.
그래서 사장님은 나에게 '피로'라고 불렀다. 지금 말하면 웃기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고 세상이 나를 억까한다고 생각이 들 때
나를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주는 어른이 있다는 건 좋은 거였다.
한 번씩 외상으로 PC방 갈 때도 있었는데 그 돈을 못 갚을 거 같아서
발길이 뜸해 지다가, 고등학교 때 외상값도 갚을 겸 그 PC방에 갔는데
사장님이 바뀌어있어서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 해도 죄송하다.
그 첫 알바를 시작으로, 알바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돈 맛을 봐버린 거였다.
부모님이 주는 돈에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돈을 사용하는 내돈내산의 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