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
'야! 이 배신자야!'
속마음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던 사장님은 내가 퇴사를 한다고 하니 많이 서운하신 것 같다며 네가 이해하라고 옆에서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나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다만, 사장님의 그런 모습은 익숙하지 않아서 약간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시니 부끄러웠지만,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면 그렇게 까지 하시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뿌듯하기도 하고, 다른 데 가서도 더 열심히 해서 내가 중요한 존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빵을 배웠던 제과점을 퇴사하지만, 그곳에서 정말 많이 배웠다. 일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예민해지고, 같이 있던 직원들과도 트러블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도 많았고, 무엇보다 사장님이 사장님 다뤘다.
내가 있던 제과점 사장님은 지금은 부산에서 명장으로 아주 유명해지셨고, 제과점 직영점 여러 개와, 대형 카페도 운영하고 계시지만, 처음 내가 입사했을 때는 본점 말고는 매장이 없었고, 사장님, 사모님과 같이 일하는 그런 작은 매장이었다. 하지만 제품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보다 컸고, 이 일을 좋아하셨다. 게다가 그 매장에 대한 애정도 넘쳤다. 그래서 제품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직원들이 성의 없이 만들거나 하면 불같이 화를 내셨다. 하지만 내가 사장님을 사장님 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제품에 대한 자부심도 있지만, 창고정리, 바깥 하수구가 막혀서 뚫어야 하는 일 등 직원들을 시킬법한 일도 직접 하셨다. 그런 허드렛일을 직접 한다는 거 자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직원들은 제품을 잘 만들고 손님응대를 잘하는, 본인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는 거다. 매장하나를 운영하려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매장에 필요한 과일이나, 채소들도 직접 사 오셨다. 배달을 시키거나 업체를 껴도 되지만, 직접 재료를 고르셨다. 그리고 직원들이 요청하는 일이 많았을 거다. 여기저기 고장 나거나 문제가 되는 일도 많았다. 어느 날 사장님께 수전이 이상해서 수압이 약해졌던 일이 있어서 말씀드렸다. 품 안에 PD수첩을 꺼내서 필기를 하셨다. 그리고 항상 직원들이 얘기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게 적어두시고 한 번도 '잊어버렸다' 라거나 '깜빡했다'라는 말씀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바로 해결해 주시거나 며칠이 걸려도 꼭 잊지 않고 정비해 주셨다. 물론 일이 너무 많아 힘들었지만, 그만큼 배우는 게 많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사장님이 그때당시 매일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매뉴얼을 잡아야 한다', '정도를 걸어야 한다'이 두 문장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돌아보니 다시금 존경스럽다.
이제는 너무 큰 회사가 돼버렸지만, 그래도 그런 게 있었다. 낭만. 나도 어렸고, 사장님 사모님도 그때 당시에는 지금 내 또래였다. 처음 이 길을 선택하고 잘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때 사장님과 사모님이 잘 도와주셨고 제안해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 잘되고 큰 업체가 되어있는 사장님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됐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난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내가 같이 일했던 사장님은 분명히 잘 될 이유가 충분했다.
다른 곳에 면접을 보고 일하며 많은 대표님들을 만났지만, 한 매장이나, 한 회사의 수장다운 면모를 갖춘 사람은 극소수였다. 사장님은 개인 제과점만 하다가 시야를 넓혀서 3호점부터 카페형식으로 매장을 꾸미고, 다른 곳에 대형 카페 사업까지 하신 거 보면 트렌드를 읽는 선견지명도 있으셨다. 솔직히 개인제과점 옛날에는 벌이가 참 좋았다. 일할 사람만 있으면 매장 2, 3개 금방 늘릴 수 있었고, 기술자라는 타이틀로 그 동네를 독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페가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하고, 카페들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빵이나 디저트 종류를 필수로 하게 되고, 배달이 되는 시대가 되고 코로나가 발발하고, 그러면서 많은 개인 제과점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있다 해도 예전처럼 고객층을 독식하기 힘든 구조가 됐다. 그래서 그때 변화를 인지하지 않고, 고인 물처럼 있던 사람들은 지금 지지부진하다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제품이나 재료의 퀄리티가 높아졌기 때문에, 원가절감하려고 싼 재료로 만든 공장형 제품은 옛날 추억의 맛을 좋아는 나이 드신 분이나, 맛을 잘 모르는 사람 말고는 즐겨 먹지 않는 시대가 됐다.
내가 좋아했던 제품을 구현할 수 있게 배울 수 있었던 기회는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 시기에 다시 돌아가도 나는 그 제과점에서 다시 일할 거다.
그렇게 친청(제과업계에서는 제일 처음 기술을 배운 곳을 친정이라고 말하는 풍습 같은 게 있었다.)을 떠나와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을 하면서 커피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설레었다. 그리고 커피를 알면 아무래도 내가 하는 일에 엄청나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취업한 곳은 벨기에 와플을 파는 카페였는데, 벨기에 와플은 얼린 와플생지를 해동, 발효를 거쳐서 와플기계에 굽는 방식이고 와플 생지 안에 '펄슈가'라고 하는 우박설탕이 있어서 녹으면서 위에 카라멜 코팅이 되는 제품이었다. 보통은 와플이라고 하면 액체로 된 반죽을 틀에 부어서 만들고, 사이에 쨈이나 크림을 같이 샌드 해서 먹는다고 생각하는데, 벨기에 와플은 빵반죽처럼 생겼고, 식감도 빵과 거의 흡사했다. 와플에는 아이스크림이 빠질 수 없는데 그곳에서도 아이스크림 2종류를 만들어 같이 판매하는 곳이었다. 요구르트와 마스카포네 맛이었는데, 생각보다 고급진 맛이어서 놀랐다. 아직 내가 일할 곳은 공사 중이었고, 백화점 안에 입점하는 매장이었다. 알고 보니 지사장이 하는 직영 매장이었다. 그래서 교육을 잘해주나 싶었다. 사실 직원 교육비도 점주가 부담하기는 만만치 않을 텐데... 면접은 따로 봤지만, 매니저가 될 언니를 소개받았다. 커피로 유명한 프랜차이즈에서 오래 일했고, 커피경력이 8년이라고 해서 놀랐다. 목소리도 조용했고 차분했다. 언니한테서 많이 배우고, 또 언니를 많이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처음 교육을 받으러 서울 본사로 상경했다.
서울을 자주 가보지 못했던 터라 숙소랑 교육장 말고는 거의 가지 둘러보지 못했다. 길도 몰랐지만, 서울의 물가가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그때 당시 부산에 1,500원짜리 잔치국수 파는 곳이 즐비했었는데, 국수 먹으러 갔다가 6,000원인 거 보고 솔직히 황당했었다. 매니저 언니와 나는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같은 숙소에 1주 정도를 서울에 있어야 하니 어색할 법도 한데, 금방 친해져서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했고, 또 언니가 친절하게 대해 줘서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첫날 교육을 받으러 갔었는데 엄청 마르고 뿔테 안경을 낀 남성분이 우리 교육을 맡아서 해주었다. 나이는 나보다 3~4살 많아 보였고 솔직히 매니저 언니보다는 적어 보였다. 하지만 교육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너무 딱딱한 말투로 교육을 했다. 생각보다 FM대로 잘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뭘 물어보면 안경을 살짝 올리면서 '그런 건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죠' 하면서 본인본인 거리는데 그게 약간 거슬렸달까...? 또 위생교육을 따로 해주진 않았는데, 매니저 언니한테 우유팩 까는 방식을 지적을 했다. 내가 봐도 조금 날카로운 말투였다. 언니 얼굴을 봤는데 언니도 살짝 얼굴이 굳어있었다. 둘 사이에서 약간의 기싸움도 있어서 나는 그냥 끝에서 조용히 와플 만들고 레시피 정리하고 그랬다. 그렇게 1주간의 실습, 교육이 끝나고 부산에 돌아갔다.
백화점 입점 매장이어서 따로 매장끼리 분리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바로 맞은편에 작은 단팥빵을 파는 매장도 들어오고, 바로 오른쪽 옆에는 피자집도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 매장이 코너 쪽인데, 코너 건너서 왼쪽에는 대만 버블티 매장으로 유명한 'G'매장도 들어왔다. 식품관을 전반적으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한 번에 브랜드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오픈을 하자마자 손님들이 엄청나게 많이 밀려들어 왔다. 사실 맞은편에 있는 작은 단팥빵집에 제빵기사가 한 명 있었는데, 이유 없이 우리 매장을 노려보거나 해서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매장에 손님이 많은데, 그쪽에는 손님이 없어서 시끄럽게 느껴져서 그랬다고 한다.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처음에 오픈했을 때 손님들한테 시식행사 비슷하게 해서 지나가는 애기들이나 손님들한테 갓 구운 와플이랑 아이스크림을 작은 소주컵에 담아서 나눠 주기도 했는데, 맞은편 매장은 그런 걸 안 하니까 매장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었다.
주변 매장들과도 어느 정도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버블티 매장의 오픈지원해 주는 본사 책임자분과는 사이가 좋았다. 마감할 때 남은 재료는 다 폐기해야 돼서 버블티를 만들어서 주변에 다 돌리곤 했었다. 솔직히 내 돈 주고 버블티를 사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식감이었고, 홍차가 잘 우러나서 맛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날 마감 끝나면 판매 못하는 생지 구워서 주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믹스는 마지막 날에는 폐기해야 해서 따로 포장해서 다른 매장에 나눠주었다. 그렇게 매장 운영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안정권에 들고 있었다. 다만 나는 커피를 좀 더 하고 싶었는데, 매니저 언니가 있는 날에는 항상 나는 와플만 구워야 했고, 커피머신을 만져볼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리고, 언니가 손목이 아프다고 해서 항상 힘든 일은 내가 하려고 했다. 청소나, 레모네이드를 위한 레몬을 짜는 일, 와플기계를 청소하는 일, 아이스크림 기계를 청소하는 일 등. 그런 거에는 별로 불만은 없었다. 늦게 퇴근하거나 하는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친절했던 언니가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나중에는 기분 등락이 너무 심해서 나도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왔다. 내가 주문받고 커피머신을 만지고, 커피메뉴를 좀 뽑으면 안 되냐고 물었을 때부터였다. 언니는 커피 종류만 할 뿐 뒤에서 베버리지 만들고, 와플 굽고,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내는 건 내 일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근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스스로가 매니저인데 내가 월권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나중에 아르바이트들도 들어오고 매장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6개월 차부터 이제 정말 일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거기에 입사한 이유는 커피를 좀 배우기 위해서였는데, 와플만 신나게 굽고 커피머신은 거의 만질 수도 없었으니 그냥 빨리 일본에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다. 거기서 일하면서 학원은 초반에 잠시 다니다 못 가고, 개인적으로 공부하거나, 그냥 스터디를 잠깐씩 할 뿐 일본어 실력은 퇴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일본어를 다 까먹고 일본에 가게 될 것 같아서 그냥 2달 후에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사장님께 일본에 가게 됐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알겠다고 했고, 사람을 구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1 달이면 사람이 구해질 줄 알았는데 매니저 언니가 몇 명 면접은 봤지만 채용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가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정해진 날에 출국을 해야 한다.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한 달이라도 다니자,라는 마음에 학원을 등록했고, 일하면서 '일본동경유학생모임'이라는 카페에서 미리 살 집도 알아보고, 선입금도 진행을 했다. 혼자 사는 집은 아니고, 셰어 하우스 같은 느낌인데, 집주인 언니랑 같이 생활을 하는 거였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는 다가왔고, 나는 차근차근 모든 것을 준비했다. 유일하게 없는 게 돈이었다. 그때당시 내 통장에는 200만 원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다음 달에 카드값 빠져나가면 100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다. 여기서 일한 걸 받아야지 어느 정도 채워진다. 출국 1주일 전부터 계속 퇴사하겠다고 했다. 근데 사람이 없어서 안된다고 했고, 월급날 말고, 퇴사하는 마지막날에 월급을 다 주기로 하고, 결국에는 출국 전날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출국 전날 통장을 보고 금액이 한참 모자라서 사장님께 연락을 했다.
'사장님 4일 치 급여가 안 들어온 것 같아요. 돈이 모자랍니다.'
라고 했더니 전화가 와서 하는 말.
'4일은 서비스로 일 해주는 걸로 하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