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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

돌아서서 안녕

by 재비

세이부 신주쿠 라인에 있는 역의 작은 제과점이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아서, 들숨날숨 심호흡 하며 들어갔었다.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자 뒤에서 어떤 젊은 남성분이 나왔다. 아마 사장님이었겠지? 그리고 뒤쪽에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 면접을 보기 시작했는데, 처음 제과점 면접이라 속으로 너무 많이 떨었었고, 일본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들리는 건 얼추 들리는데, 말을 하는 거 자체가 일단 잘 안 됐다. 근데 그 떨고 있는 와중에도 그 사람의 표정을 잘 살펴봤는데, 표정이... 뭐랄까 전혀 면접을 보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심심해서 호기심에 나를 불렀고,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놀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말들을 더듬더듬하고 있는데 갑자기 말을 끊더니

'너 일본인처럼 말하고 쓸 수 있어?'

'아직은 어렵지만 노력하겠습니다.'

'일본어도 못하는데 일본에는 왜 온 거야?'

'일본을 좋아했고, 문화를 알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에서의 경력이 우리한테 필요할 거 같다고 생각한 거야?'

이쯤 되니 지금 나를 놀리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까짓 게 뭔데 나를 불러서 이렇게 놀려도 되는 건지 너무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앞에서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따지는 말 같은 거 할 수도 없었다.

'그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하고 그 자리를 나와 버렸다. 나오면서 너무 화가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왜 공부를 열심히 안 하고 일본어를 못해서 따지지도 못하는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건지. 그냥 한국말로 욕이라도 해주고 올걸. 하는 수많은 후회를 했다. 그렇게 집에 가는 전차역으로 걸어가면서 실컷 울었다. 그리고 전차를 타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후로 면접을 10군데 정도 봤었는데 다 떨어졌다. 비루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 그냥 한인타운에서 한국 사람들과 일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한국인이었는데, 면접을 한번 보러 오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이력서를 또 쓰고 긴장을 하면서 집을 나섰다. 어느 사무실에 들어가서 면접을 봤는데, 생각보다 직원이 2~3명으로 적었다.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이 내 한국 이력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 게 인상 깊다고 일을 시작해 보는 거 어떻냐고 했다. 첫 달에는 시금 900엔, 다음 달은 950엔, 3개월 째는 1000엔으로 시급을 쳐주고, 하루에 10시간을 일하는 일이라고 했다. 주중 하루 휴무고 회사가 크기 때문에 원하면 비자가 나와서 일본에서 쭉 살 수도 있다고 얘기해 줬다. 일단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엄청난 메리트를 느끼고 바로 입사를 결정했다.



한국가수, 일본가수 음반도 팔고, 방송분 녹화, 굿즈도 팔고 하는 그런 매장이었다. 내가 면접을 봤던 곳은 그냥 사무직들이 잠시 일하는 곳이었고, 매장은 12명 남짓 일하는 큰 매장이었고, 분점이 오사카에 까지 있는 제법 큰 회사였다. 포장하고, 접객하고, 원하는 제품 찾아주고, 진열하고 등등하는 일이었다. 같은 회사의 매장인데 주변에 음료나 노오븐 디저트를 파는 곳에도 대체인원으로 한 번씩 일하러 갔었다. 전공을 살릴 수 있어서 좋았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 매장이었다. 직원은 한국인들이 많았고, 일본인 직원도 몇 명 있었다. 다만 손님은 100% 다 일본인이었다. 그 매장에서 하는 일이 원래 전공도 아니고, 거기 있는 차장님, 대리님 등 직급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좀 이상했다. 체계도 안 잡혀 있는데 약간 텃세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주어진 일이니까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제품 위치도 모르겠더니 1,2달 일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렇게 6개월을 그곳에서 일했다. 중간에 돈을 좀 더 벌고 싶어서 몬자야끼 집이나, 야끼니꾸 집에서 잠깐 야간 알바도 했었는데, 일을 2개나 하니까 사람 몸이 썩는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일본에서의 생활의 목적을 제과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제과점을 많이 둘러보는 것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많이 먹어보고, 많이 다녀보는 것.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라고 생각했다.



제과점뿐만 아니라,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과 가끔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갔다. 타베호다이, 바이킹이라고 우리나라 말로 뷔페 같은 곳도 자주 갔었고, 편의점 시즌 제품도 빠지지 않고 항상 사 먹었다. 일본은 기획의 나라였다. 한정제품이 너무 잘 나왔고, 기발했다. 그리고 패키지도 너무 고급스럽고 제품을 위한 포장을 잘해주는 것에 감동받았다. 우리나라 백화점은 유명한 브랜드가 팝업매장으로 입점하기도 했지만, 일본은 정말 유명한 스위츠 브랜드들이 백화점에 정식입점 하고, 퀄리티도 정말 좋았다. 디스플레이도 배울게 많아서 사진도 엄청나게 많이 찍었다. 또 마트에서 사거나 음식점에서 사 먹는 물가도 싼 편이었다. 집값과 교통비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집 주변에 역 3~4개 정도 걸쳐있는 긴 공원이 있는데, 거기를 자주 산책 했다. 걷는 것도 좋았는데 거기에서 산책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는 것도 좋았다. 우리나라는 뭔가 급하고, 여유가 없다면 공원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잘하지는 못해도 본인 만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림 그리고, 사진을 찍고, 책을 읽고... 너무 여유롭고 나도 늙는다면 그렇게 늙고 싶었다.



그렇게 일본에 와서 생활한 지 10개월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그전에 있던 제과점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매장을 오픈하는데, 나를 공장장급으로 부르고 싶다면서 연락이 왔다.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일본 워킹홀리데이가 끝나는 시기를 맞춰서 다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해서 바로 호주로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도 살아보고, 일본에서도 살아보면 내 앞으로의 방향성도 새로 조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어는 솔직히 자신 없었다. 하지만 일본어도 0에서부터 시작해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일상생활 언어는 무리 없이 할 정도로 익숙해졌고, 영어도 해보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호주는 많은 인종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고, 농장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영어를 그다지 못해도 베이커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많고, 일본보다 비자 연장이 잘 된다는 것도 건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 들어가 책임자를 해보는 게 내 커리어에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때 당시 내 경력은 4~5년 정도였고, 그 정도 경력으로 어느 개인제과점에서 공장장으로 써주는 곳은 없었다. 한번 책임자를 맡게 되면 그 이후는 계속 책임자 급으로 일할 수 있고, 연봉도 그렇지만 책임자가 돼보면 업무에 대한 숙련도도 더 올라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호주행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나의 첫 외국 생활이 막을 내렸다. 그동안 따뜻하게 대해줬던 언니랑 요미도, 내가 퇴사한다고 했더니 당장 비자를 내준다며 퇴사하지 말라고 일본에 계속 살라고 아깝다고 말리던 회사 담당자도, 내가 조용하게 걷던 공원도, 돈이 없어서 매일 한 끼는 꼭 먹었던 규동집도, 내가 처음 일본에 와서 방문했던 집 주변에 큰 마트도, 내가 좋아했던 일본 생활이 많이 아쉬웠지만, 내가 내린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서 짐을 싸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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