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고고(零丁孤苦)
'L을 내보내는 게 어때?'
내가 입사하면서 회사가 조금씩 확장할 기미가 보였다. 부산에 있는 본점, 2호점, 그리고 곧 생길 대구점 이렇게 3개의 매장을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기장 쪽에 로스팅 공장으로 사용하던 곳을 제빵 공장으로 세팅하면 어떻냐고 제안을 하셨다. 그러면서 이사님은 L의 얘기를 시작한 거였다. 지금 생산하는 모든 인원을 그 기장에 있는 공장으로 옮겨서 같이 일을 할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공장에는 실력 있는 핵심인재만 있었으면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약간 당황하며 조금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말을 끝냈고, 이사님도 동의해 주셨고 찝찝한 마음으로 본점에 복귀하게 되었다.
L과 Y는 나를 믿고 와주었고, 나 또한 그 친구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같이 실무를 하게 되면 즐겁게 생산할 날들이 많아질 줄 알고 영입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실무를 많이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장동선이나 세팅, 새로운 대구점에 들어갈 그림이나 테이블 크기 등 시키는 건 사무업무 등을 해야 하는 시간들이 많아졌고, 본점의 바리스타들 까지 관리를 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새로 구하고, 면접을 보고, 전체적인 관리 업무를 시작하면서 실제로 제품을 만드는 상황이 엄청나게 적어진 거였다. 함께 일을 할 줄 알고 이 매장으로 온 L과 Y는 20대 초, 중반이었고 지금 생각해도 많이 어렸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회사가 나아가는 방향과 내가 같이 생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 친구들은 많은 섭섭함을 느낀 것 같았다.
어느 날 바리스타 매니저가 나에게 물었다. '팀장님 L과 친하신 거 아니었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워낙에 오픈 주방이라 L이 내가 없을 때 나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고 한다. 그 얘기들을 매니저가 듣고 나한테 물어본 것이었다. 사실 친한 거 맞다. 아니다 친했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업무가 달라지면서 L은 예전 같지 않았다. 내가 친근하게 다가가면 예민하게 굴 때도 있었다. 나는 그냥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주 저녁을 사주고, 술도 한잔씩 사주고, 그랬는데 그것들 마저도 L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그러면서 이사님이 한 얘기들이 떠올랐다. 정말 보내줘야 하는 걸까?
대구에서 상주하시던 대표님이 어느 날 동성로에 있는 잘되는 제과점들 규모나 제품라인업, 분위기 등 시장조사도 하고, 공사하려고 하는 건물등을 보러 대구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고 이사님과 나는 대구로 올라가게 되었다. 솔직히 대구에 있는 제과점은 부산에 있는 제과점의 제품들이랑 조금 달랐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그리고 공사예정인 부지도 확인을 하고 저녁에 대표님과 식사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대표님께서 갑자기
'지금 한 매장의 팀장이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본부장으로 승진한다. 앞으로 매장 3군데에서 나오는 순수익의 3%를 지분으로 챙겨줄게.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도록. '
본부장이라는 타이틀은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직급이었다. 내가 그런 타이틀을 달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또한 지분을 준다는 말에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분이 뭐지? 지금까지 월급만 받아왔던 내 인생에 지분이라는 단어는 정말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이 사업체가 정말 내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3%만큼은 이제 내 거다.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이사님의 설명을 해주셨는데, 대구점 까지 생긴다면 1년에 못해도 중형차 한 대씩은 뽑을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일 거라고 얘기하셨다. 아직 그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돈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아직 내 수중에 들어오기 전의 돈이니까. 그저 나에게 그런 자리를 주고, 그렇게 선뜻 약속을 해주는 대표님과 이사님이 고마웠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다.
2호점에 있던 실장은 퇴사를 했고, 2호점에서 필요한 제품을 본점에서 만들어 2호점으로 이동하는 방식이 되었다. 당연히 본점은 바빠졌고, 내 휴무는 거의 없어졌다. 연말동안 크리스마스다 뭐다 새벽 2~3시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겨냥해서 롤케이크를 만들었는데, 흰자로만 만든 화이트 딸기롤과, 에스프레소가 들어간 티라미수 롤 이렇게 2종류였다. 하지만 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해서 인지 엄청나게 잘 팔렸고, 원래 약속했던 개수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게 되었다. 나도 체력적으로 너무 지쳤고, L과 Y는 휴무는 챙겨 줬지만, 근무시간까지는 어쩔 수 없어 오랜 시간 일하게 되었다. 연말에는 보통 16시간~18시간 근무 피크인 날에는 20시간을 일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해줘서 고마웠다.
연말이 지나고, 이제 공장 세팅도 거의 끝나서 공장으로 출근할 날이 다가왔다. L과 나는 더더욱 서먹해졌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이사님께 조언을 구하니, 그냥 L을 잘 내보내고 Y를 잘 키워 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L과 식사자리를 하기 위해 한 고깃집에 도착해 마주 보고 앉았다. L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많이 화가 나 보였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지금 일하는 게 어떤지 얘기를 해보라고 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얘기를 해줘야 나도 도울 수 있다고 하니 갑자기 울분을 토하듯 얘기했다.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 이 일을 한걸 후회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일을 한다는 건 어느 정도 성취감도 동반 돼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정도로 이 일이 싫을 정도로 여기 온 걸 후회한다니.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화만 나는 것도 아니고, 유감인 감정, 미안하고, 서운한 감정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내 안에서 터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얘기했다.
'네가 그 정도로 힘들다면 그만두는 게 맞지.'
L은 19살 때부터 처음일했던 제과점에서 실습생으로 일했던 친구였다. 내가 매장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생이었고, 재미있고 친절하고, 활발한 친구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고,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 나는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힘들면 먼저 말하지.'
'언니도 힘들데 어떻게 말해요! 그래도 사람 구할 때까지 있을게요. '
'아니. 네가 그 정도로 일을 하기 싫은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일을 시키냐.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 모레부터 공장 출근하는 날인데 그냥 해볼게. 그리고 이렇게 그만둬도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연락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알았어요. 언니 미안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어두웠다. 내 기분 같았다. 내 마음 같았다. 공허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본점에서 Y와 함께 둘이 일을 하게 됐고, Y에게도 자초지종을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일단 L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고, 이제 너랑 나랑 둘이서 일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사님이 전달하라고 한 얘기는 L의 빈자리가 있으니 Y를 승진시키고 그 밑에 직원을 뽑자는 거였다. Y에게 의사를 물어보니 본인도 해보고 싶고, 노력해 본다고 대답했다. Y에게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웠다. 다음날이 공장으로 출근하는 첫날인데, 이사님이 픽업 가겠다고 전달하고, 일찍 귀가시켰다. 나도 집에 도착해서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눈을 떠서 핸드폰을 보니 Y에게 장문의 문자가 와있었다.
'본부장님 생각해 봤는데, 솔직히 L언니 보다 제가 더 먼저 퇴사 생각을 했고, 제안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오늘부터 출근은 못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정고고(零丁孤苦)-가난해지고 세력이 꺾여 도와 주는 사람도 없어, 혼자서 괴로움을 당하는 어려운 처지를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