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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

개척자

by 재비


그렇게 퇴사를 생각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다음날 출근 했고, 퇴사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예상대로 사장님은 당황해했다. 이렇게 급속도로 전개될지는 몰랐을 거다. 사람 구할 때까지 2~3개월은 인계해 주기로 했다. 오픈멤버들이 다 나가고, 물갈이가 된 상태에서 직원들을 3명 정도 구했었는데, 생각보다 운영이 잘 됐었다. 매장도 오픈한 지 2년이면 자리를 거의 잡은 상태여서 사실상 새로운 팀장의 자리는 무의미했을 지도... 요즘에야 리더십 같은 얘기를 하지, 예전에는 제과점에서 책임자는 모든 업무에 대체로 다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업무를 직원보다 많이 해야 하며, 모든 업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리더십보다는 그냥 업그레이드된 생산자라고 봤다. 지금까지도 제과점이나 소규모 매장에서는 리더십보다는 생산능력이 우선이 되기 때문에 밑에 신입직원들의 이탈도 많은 편이다.



내가 일본에서 처음에 돌아올 때 내 경력에 한 매장의 팀장을 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어서 급하게 귀국을 했던 것도 있었다. 2년 동안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많이 배웠고, 팀장이라는 직책도 처음이라서 좌충우돌했고, 팀장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도 알게 됐다. 그렇게 날짜가 다가와서 퇴사를 하게 됐다. 퇴사하게 된 그 제과점의 사장님은 내가 처음 일했던 제과점 사람들에게 내 안 좋은 얘기를 하고 다녔다는 걸 알게 됐다. 직원들을 통해 말을 옮긴 것도 그 사장님이 발단이었겠지. 하지만 다 지난 일이고 앞으로 마주칠 일도 없는데 딱히 화낼 필요도 없는 거 같았다. 내가 처음 일했던 제과점에 다른 분점이 새로 생겨서 인사할 겸 생산실에 내려갔는데, 기존에 알던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그 매장에는 사모님을 뵈러 간 거여서 사모님께서 사실 확인을 하는 거라고 물어봐 주셨고, 내가 답변을 하니,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사모님은 나를 믿으신다고 얘기해주셨다. 감사했다.



그렇게 마음도 몸도 지쳐있는 상태에서 나는 두 달 정도 쉬게 되었고, 쉴 때도 다른 곳에 꾸준히 면접을 보러 다녔다. 직전에 팀장이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관리자 급으로 면접을 보기 시작했고, 직전에 다녔던 제과점에서 내가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자 연봉도 조금 올려서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곳에 면접을 봤지만 바로 입사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일반제과점에서는 오래 일 해봤으니까 커피에 좀 더 중점을 둔 베이커리 카페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좀 더 트렌디하고, 소수의 제품에 집중도 할 수 있고, 커피도 더 알게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날 00 브레드라는 곳에 공고가 올라와있었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매장에 커피를 전문적으로 하는 느낌도 있었고, 심지어 빵 종류나 쿠키종류도 뭔가 기존에 배우던 제품과 다른 느낌이라서 면접을 꼭 보고 싶었다.



그렇게 연락이 된 곳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완전히 오픈 주방이었다. 매장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나를 면접 보는 사람이 뭔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느낌이었고, 그 부분이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일하는 게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 질만큼 힘든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면접시간은 10분 내외로 짧았다. 그 매장의 최고관리자는 따로 있었고, 나를 면접 본사람은 베이커리 쪽 실장이었다. 저런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살짝 등골이 서늘해졌다. 1차 면접이 끝나고 곧바로 2차 면접이 잡혔다. 내가 면접을 봤던 곳은 1호점이었고, 2호점은 부산 현대백화점 2층이었다. 매장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백화점 안이라서 깨끗했다. 자리를 안내받아 기다리고 있는데, 약간은 그물처럼 생긴 편안한 니트를 입은 어떤 젊은 남성이 나한테 인사를 했다. 머리가 모히칸 스타일? 지금이야 투블록 같은 용어가 있었지만, 그때의 그 사람의 머리는 윗머리를 묶어질 정도로 기르고 옆머리는 짧게 친 그런 머리스타일이었다. 얼굴은 어려 보였는데 흰머리가 많아서 뭔가 트랜디 해 보이고? 특이한 인상을 줬다.



그 자유로운 영혼 같은 남성은 그 사업체의 '이사'님이었다. 대구에 대표님은 따로 있고, 그 대표님은 디자인 회사를 따로 갖고 있어서 사실상 매장관리는 이사님이 하신다는 거였다. 면접은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사실 면접이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까웠다. 이사님은 내 생각을 자유롭게 물어봤고, 어떤 곳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그런 부분을 얘기해줬다. 그렇게 면접이 끝나갈 무렵에 그 자리에서 바로 출근 의사를 물어봤다. 그래서 본점에서 내가 일하게 되는 거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했다. 그럼 그 의욕 없는 실장이랑 일해야 하는 거고, 내가 그 사람 밑에서 일을 하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고 그 사람은 곧 그만 둘 사람이고, 그 자리에 들어갈 사람을 뽑는데, 그게 내가 될 거라고 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긴 했지만, 솔직히 앞이 깜깜하기도 했다. 좋은 건 그 사람 밑에서 일하지 않는 거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그곳에 가서 기존 메뉴를 그 사람에게 인계를 받고 완전히 황무지에서 개척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출근날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인계를 받기 위해 배합표를 봤는데, 생각보다 레시피가 좋지 않았다. 빵을 더 안정적으로 나오게 하는 계량제를 전 제품 다 사용하고 있었다. 계량제는 식품첨가물의 일종인데, 계량제를 첨가하면 빵은 안정적으로 나오지만, 소화가 더 안될 수도 있고, 몸에도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렇게 인계를 받고, 계량제를 사용하지 않는 배합으로 바꾸자고 제안을 했는데, 그 실장이라는 사람은 '너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레시피 다 풀려고 하지 마요. 나중에 자기거 할 때 써야죠' 이렇게 얘기해서 그냥 웃으며 넘겼지만, 책임감이 많이 결여돼 보였다. 레시피라는 건 그냥 레시피이다. 특히나 제빵 같은 경우는 수많은 변수들이 있어서 레시피가 같다고 해서 같은 제품, 같은 맛이 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레시피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 하다 보면 레시피를 조절하거나 개발할 수도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도 아닌데, 그렇게 직장에서 몸 사리면서 일하는 타입이라 표정이 어두웠나 생각했다.



그렇게 그 매장에서 하는 빵과 케이크, 쿠키를 비롯해 모든 제품을 인계받았다. 일반 개인 제과점에서 하지 않는 그때 당시 핫한 '레드벨벳'이라는 케이크가 있었는데 만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식용색소가 많이 들어갔고, 그런 게 몸에 좋을 리는 없었다. 나는 제품을 만들 때 맛있고, 어느 정도 좋은 퀄리티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제품이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비주얼 적인 부분을 더 중시하는 제품들이 많았다. 한창 유행했던 '무지개 케이크, 무지개 카스텔라' 같은 제품이 많았는데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색소가 많이 들어간 제품은 아마 먹으면 물감 맛이 날 것 같아서 먹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준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아니, 더 까다로워졌다. 색소나 인공향료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자연물로 색과 맛을 내는 건 내가 제품을 만드는 하나의 기준이 됐다.



어디를 가든 나는 항상 일복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존에 있던 직원들이 흡연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실장 포함...) 얘기했더니 일하면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해서 퇴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뭐 퇴사를 한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냥 사람을 새로 구하기로 했다. 총 3명이 그만두는 거였다.

뭐 개인제과점에서 혼자 혹은 사장님이랑 둘이서 일한 적도 있는데, 이 정도 물량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혼자 할 수도 있는 물량이었다.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나는 곧 내가 책임지고 맡아야 될 작업장의 냉장고, 냉동고, 창고를 한번 체크하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냉장고나 냉동고에 재료들이 너무 많았다. 이건 사용하는 거냐, 어디에서 쓰는 거냐 물어보면서 안 쓰는 재료 싹 모아서 그 재료를 사용한 신제품을 하나씩 내기로 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 것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 안 쓰는 재료를 그래도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를 해서 수익에 기여를 하니 이사님이 생각보다 나를 좋게 봐주신 것 같았다.



직원들이 다 나가고, 기존에 있던 실장은 퇴사하기 전에 2호점에서 혼자 근무를 하게 됐다. 본점에는 사람이 구해지지 않아서, 그전에 같이 일하던 동생들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일 안 하고 있으면 여기서 같이 일하지 않겠냐고. 가장 처음에 일하던 제과점에서 알던 동생 L과, 최근에 퇴사하게 된 제과점에서 일하던 어린 친구 Y를 영입하게 되었다. 흔쾌히 나와 같이 일하겠다고 하고 이 매장에 왔고, 그렇게 우리 셋은 열심히 이 매장을 위해서 생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L은 처음에 입사할 때 이사님과 면접을 봤는데, 급여 부분이 조금 높았던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나보다 동생이지만, 이 업을 일찍 시작했으나, 개인제과점에서 경력을 쌓는 대신 대기업 제빵기사로 일하다가 이 매장으로 들어온 케이스였다. 하지만 제과 쪽에 관심도 많아서 이사님을 설득 후 L을 영입했다. 이사님은 L에게 여러 가지 제품을 개발하게 시켰다. 제품구현력이 좀 떨어지는걸 인지했다. 나도 L과 함께 일한 지는 오래돼서 실력을 잘 몰랐는데, 이렇게 되니 중간에서 내가 많이 난처해졌다. 이사님은 점점 L을 답답해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L을 내 보내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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