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

by 재비


등골이 서늘했던 이유는 그 당시에 이해를 못 했다. 그냥 이사님의 너무나 광활한 계획 앞에 아는 게 별로 없는 나는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수입, 수출, 컨설팅 등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제품 만드는 것 밖에 없는데 내가 이 팀에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나고, 여러 번의 회의를 하면서 처음에 제주도에 쇼케이스 매장을 해서 컨설팅을 하자는 방향성과는 다르게 계획이 아카데미 쪽으로 수정이 됐다. 이사님은 이번에는 일본에 같이 다녀오자고 하셨다. 일본에 있는 꼭 가고 싶은 카페도 있다며 먼저 제안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각자의 돈으로 나눠서 경비를 사용할 거고, 숙소나 비행기는 총무를 담당하는 실장님이 대신 예매, 예약해 준다고 나는 몸만 따라오면 된다고 했다. 뭐 워킹홀리데이 이후 일본에 한두 번 갔었지만, 그래도 내가 뭔가 이 팀을 위해 어쭙잖은 회화실력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일본으로 출발했다.



일본에서의 출장은 생각보다 신체적으로 좀 힘들었다.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타는 대신 전차를 타고 갈만한 곳은 전차를 탔지만 나머지는 전부 걸어 다니자고 하셔서 내가 핸드폰으로 구글맵 켜가며 길잡이 역학을 했다. 거기에서 괜찮은 곳을 몇 군데 가기는 했지만, 일본의 빵투어. 아니, 어느 빵투어를 가더라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고, 제품을 먹을 수 있는 위장의 크기는 한정적이며, 아무리 맛있어도 결국에 배가 부르면 질리기 마련이다. 하루에 8~10군데 정도의 카페, 베이커리 매장을 둘러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에 이런 일본느낌의 제품을 커리큘럼으로 넣으려고 하시는 건가?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솔직히 일본의 제품을 기반으로 커리큘럼을 짤 수는 있겠지만, 이거는 내가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부분이다. 저녁에 사 온 빵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회의를 했지만, 딱히 내가 갈피를 잡을만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의 출장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1달이 지났다. 사업은 진전은 딱히 없었다. 그냥 1주일이나 2주에 한번 회의를 진행했는데 거의 이사님 위주의 방대한 계획을 들을 뿐이었고, 나는 그냥 듣고 끄덕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수입 없이 사업적 진전도 없이 그렇게 3개월 남짓을 버티다가 이사님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겠다고 얘기했다. 이사님은 처음에 반대를 하셨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최대한 시간을 많이 빼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다. 다달이 나갈 카드값 생활비, 통신비 등 기본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돈이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상황인데, 3개월을 수입 없이 그러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이 됐다. 아르바이트라고 하기에는 하루 7~8시간 일하는 거였고, 서면의 애ㅇ리 퀸즈 베이커리 파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원래 내가 하던 일들을 아무런 경력을 쳐주는 것도 없이 최저시급을 받고 일해야 하다니... 하지만 거기서도 배우는 게 있었다. 대기업 뷔페라고 해서 다 완제품으로 받아쓰는 줄 알았는데, 직접 시트를 만들거나 반죽을 만드는 것도 있었고, 플레이팅 이라던지, 대기업에서 위생관리, 일지 쓰는 방법 등 이것저것 배우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는 나름대로 재밌었지만, 수익측면에서는 당연히 아쉬웠다. 마음잡고 일을 한다면 두 배의 급여를 받을 수 있는데 왜 내가 이러고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던 와중에 다시 이사님이 회의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고, 회의를 시작했다.



이사님이 항상 얘기하는 부분은 이거였다. 그리고 그날도 똑같은 얘기의 반복이었다. 나한테는 이 건물이 있다.(현재 본인이 살고 있는 건물이 대출은 있으나, 명의는 자가) 그리고 이 건물을 활용할 수 있다. 하와이에 아는 농장에서 질 좋은 원두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미팅결과 MOU도 체결이 가능한 상태이다. 재료를 수입해서 싼 재료로 질 좋은 디저트나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를 해야 한다. 아카데미를 열려면 강사의 능력치가 중요하다. 모두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뭔가 실현 가능성이 그때는 있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지만, 그때 당시에는 뭘 모르고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따라갔던 것 같다. 그렇게 그날도 회의를 진행하던 도중 이사님이 나에게 물었다. '아카데미를 할 건데, 나는 큐(큐그레이더-커피의 맛을 판별하는 감별사.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정해 주는 자격. 줄여서 큐라고 하셨음.)라는 자격도 있고, 컨설팅해 본 이력 등 이점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너한테 어떤 자격과 이점이 있어? 너한테 수업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나한테 설명해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걸 내가 설명해야 하는 건가? 그 말을 듣고 뒤에 했던 이사님의 얘기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동업자가 아니라 아직까지 그냥 이사님의 부하직원이고, 처음에 얘기했던 동업은 허울 좋은 말이었구나. '



나는 내 능력을 알고, 선뜻 뭔가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하고, 나라는 사람을 발굴해 준 이사님이 감사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그 사람들과의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이사님도 물론 나에게 잘해주셨다. 함께 일하는 동안 나야 상사라고 생각해서 이사님의 행동을 따랐으나, 가족들과 그 당시 남자친구는 이사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통화를 몇 시간씩 하거나, 회의를 하루종일 하거나, 쉬는 날에도 가족과 있는 내 생일에도 선물을 주겠다며 나를 불러서 저녁 약속 시간에 몇 시간 늦은 적도 있다. 특히나 남동생과 남자친구는 거의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제발 벗어나라고 얘기를 했지만, 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일하기로 한 이상 그 사람의 부하직원인 이상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나는 가진 게 없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돈이 많은 부모님도 없고, 내 뒷배가 돼줄 누군가도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오고 다져왔던 부분은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과 일을 하길 바랐다. 그리고 내 가치는 나 스스로 결정을 하기에는 그때는 어렸다. 잘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지나온 길과 내가 해온 행동들에 대해서 나 스스로 의심하게 하는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내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내가며 저 사람과 일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이사님은 처음에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나 내 책임감, 그리고 제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보고 나에게 제안을 하신 거다. 나는 내가 제주도에 매장이 생긴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의가 거듭되고, 판을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고, 회의의 주최자나 의견등 거의 이사님의 방향대로 핸들링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말을 듣고 나는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



그리고 고심에 고심을 하며 이사님께 내 생각이 정리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통화를 하거나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하게 된다면 내 생각을 말하기도 전에 이사님은 나를 회유할 것이라 생각했고, 휩쓸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의사전달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이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피할 이유는 없었기에 전화를 받았고 통화를 이어갔다. 이사님과 오랜 시간 통화를 하고, 엄청나게 많은 얘기를 한 사람이 나다. 이사님은 젠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정말 화가 났지만 절제하는 목소리였다.



약 10개월 만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그냥 트렌디한 카페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경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많은 경험을 하게 됐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일은 없었다. 마음을 다치고, 좋아하는 동생들을 잃었지만, 그때 잃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잃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시기적으로 그랬고, 그 시기는 언제든 어떻게든 다시 오기마련이고, 사람은 영원히 내 곁에 있지 않는다.



그렇게 대장정을 다시 마무리하고 나는 취업전선에 본격적으로 다시 뛰어들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