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

또 다른 시작

by 재비



'아이씨 진짜 어린 X이. 더러워서 일 못하겠네. 내 그만두고 대구로 그냥 올라갈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느꼈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서였다. 보통은 저런 발언은 참다 참다 화나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서 나는 소리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사람은 상대방에게 화를 낼 때 계획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그냥 터져 나오듯이 분출되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언성을 높일 때 나는 저 사람이 일부러 화내는 척을 하는 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이상한 상황에 말리겠는데?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먼저 선수를 쳤다.

'아뇨. 나가려면 제가 나가야죠. 저는 퇴사할 사람이고, 부장님은 계속 계실 분이니까요. 인계는 경력이 많으시니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바로 나갈게요. '

라고 말하면서 바로 짐을 쌌다. 그리고 그 2명의 표정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구에 있는 대표님에게 연락을 했다. 사정이 이렇게 돼서 그냥 먼저 그 자리를 나왔고, 내가 도와 줄일 있으면 업장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인계할 테니 연락 달라고. 이사님께도 연락해서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고 전달드렸고 그 길로 바로 집으로 갔다. 너무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 다사다난해서 몇 년은 있은 거 같았다. 나는 그저 트렌디한 브레드 카페에서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물론 배운 것도 많다. 처음으로 공장을 세팅해봤고, 다른 업체들 사장님과 미팅도 했다. 나는 분명 지금까지 책임감 있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이 얘기한 그 3% 지분과 말도 안 되는 본부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말 그대로 내 몸을 갈아가면서 일하면서도 그 3%의 돈은 구경도 못했다. 내가 생산을 많이 못해서 다른 곳에서 빵을 사 왔고 그것 때문에 회사에 남는 돈이 없다느니 하는 소리와, 결국에 나중에 연락 와서 내가 명세서를 빼돌렸다느니, 너 때문에 회사가 손실이 크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가스라이팅까지 같이 당했다.



나중에 본점에 있는 H가 연락이 왔었는데, 횡령건으로 경찰이 나를 찾는다는 거였다. 근데 누가 봐도 그 말은 거짓말이고, 나를 떠보려고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횡령할 게 있어야 횡령을 하지.. 그리고 경찰이 바보도 아니고 우리 집 놔두고 왜 거기 가서 나를 찾냐고.. 그래도 H에게는 잘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대표님의 꾀에 빠져 나한테 까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H도 그다지 질이 좋은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날이 별로 남지 않았다. 식습관과, 휴식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살도 찌고 몸도 안 좋아진 내 모습을 조금 되돌리고 싶었으나, 퇴사를 하면서 곧바로 이사님은 차후에 사업을 시작할 제주도로 갈 출장 계획을 짜셨다.



물론 나도 처음 해보는 창업(은 아니었지만 동업이라 하셨으니..)이라 열심히 참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하도 일이 많았어서, 내 열정은 없어진 줄 알았는데 다시 다른 일을 하려니 뭔가 에너지가 생겼다. 이사님은 그동안 힘들었던 부분도 회복할 겸, 시장 조사도 할 겸 카페나 베이커리를 둘러보는 거라 편하게 생각하라고 하셨다. 이번 출장비용은 이사님이 다 지불하고, 다음 출장부터는 금액을 나눠서 내자는 말씀도 하셨다. 나는 태어나서 일본은 갔다 왔어도 제주도는 처음이라 약간 긴장을 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이지만, 외국 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 지역이라고도 들었고, 제주도에 여행 가서 아예 제주도에 살고 싶어서 내려오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 여서 기대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베이커리와, 카페들도 추려서 실장님께 전달하고, 얼마 안 있어 우리 5명은(이사님 내외의 아들이 1명이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 제주도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제주도는 한국의 하와이 같았다. 물론 하와이도 가본 적 없었지만, 하와이에 온 것 같은 야자수가 공항 밖에 즐비해 있었다. 날은 초여름이라 더웠다. 하지만 앞으로 즐거운 일을 할 거라 생각하니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제주도의 베이커리는 어떤 메뉴를 하는지, 어떤 커피를 하는지 먹어보고 소감을 얘기하는 시간도 숙소에서 가졌다.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미리 독채를 예약해서 쾌적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부산에서 하는 제품보다 나은 매장은 딱히 없었지만, 제주도라는 특성상 잘되는 집도 있었고, 그냥 마케팅을 잘해서 잘 되는 매장도 있었다. 어떤 한 카페는 정말 바다 위에다 건물을 올린 것처럼 파도가 치면 물이 테라스까지 올라오는 곳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낭만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매장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니고, 사진도 찍으면서 정보를 많이 수집했다. 제주도에 그때당시 특산물인 흙당근으로 만든 당근케이크나,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 같은 제품이 많이 있었는데, 나중에 제주도에서 매장을 한다면 그런 시즌 상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따로 메모도 해두었다. 마지막날 저녁 일정을 마치고, 좋은 숙도에서 술 한잔 하면서 마무리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사님이 얘기하셨다.

'제주도에 매장을 하는 것도 하는 거지만, 아카데미를 같이 열면 더 효율적으로 사업체를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아카데미에서 수료를 한 사람은 무조건 우리에게 컨설팅을 받을 거고,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가니까 사업도 금방 클 거야. 갑자기 든 생각인데 하와이에서 원두를 수입하면서 그곳 농장과 MOU를 맺고....'



뭔가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면서 살짝 등뒤가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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