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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

고진감래

by 재비

'아까 그냥 못하겠다고 집에 간다고 하고 가시던데요?'

'네?'



이런 좋은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고? 이거는 맞고 안맞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저기 구르며 다니고, 산전수전 겪었던 내 시절을 생각하면, 이 회사는 경력자에게는 좋은 환경이다. 마인드가 좋은 대표님, 좋은 시설, 좋은 직원들. 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곳에 왜 하루도 못 있고 이탈하는 걸까? 내가 실력이 없어도 붙어있고 싶을 거 같았다. 사람 생각하는 건 다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혼자 생각했던 경쟁구도에서 경쟁자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모르게 김이 빠진 느낌이랄까? 아무튼 주변인도 없으니 더욱더 제품을 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썼던 기계들이 아니어서 어색하긴 했지만, 제품이 나오는 걸 보니 반죽이나 속재료도 만족스럽게 잘 나와서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이런 베이직하고 손에 익은 제품을 만들고 있으니 도파민이 막 나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나는 이 일을 좋아했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송정 공장에서 20시간 24시간 기계처럼 일할 때는 힘들고 회의감도 들었다. '내가 이 일을 뭘 위해서 왜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지배됐다. 다시 제품을 만들고 있으니,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너무 소량은 업소용 기계에 반죽이 잘 쳐지지 않아서 1킬로 정도로 양을 조절했는데 그래도 5가지 제품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베이커리 직원들은 전부 와서 맛을 보는데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부서에 나눠줘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무작정 부서별로 나눠서 이것저것 챙겨서 사옥 투어를 하게 됐다. 인사를 하고, 첫날이라 어색하게 설명하면서 전달을 했다. 사옥에 있는 다른 부서 직원들도 친절하게 받아줬고, 맛있었다는 피드백을 종종 들었다.



그리고 약 10일 정도를 그렇게 제과 제빵 할거 없이 온갖 제품을 만들어가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생각보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직원들 반응도 좋았고, 대표님 역시 뭔가 흐뭇한 미소를 보여주셔서 나름대로 안심했다. 이제 내 실력을 보여줬으니, 여기 있는 제품을 인계받고 이 부서에서 잘 적응하는 일만 남은 거 같았다. 대표님도 2주 동안 맛있는 제품 만들어 줘서 고맙고 직원들도 맛있다고 했다며 바로 인계시작하면 될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2주 동안 베이커리 직원들과는 생각 이상으로 친해지게 됐다. 처음에 입사했을 때 인원은 4명이었다. 곧 그만두는 친구 한 명. 경력자인 여자 직원 한 명. 나머지는 경력이 없는 남자 애들 둘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처음 내가 왔을 때 서스름 없이 대해줬다. 엄청 친절했고, 유쾌하고, 재밌었다. 알보고니 대표님의 친척동생과 처남이라고 했는데, 나는 솔직히 그런 거 중요하지도 않고, 개의치 않았다. 대표님과 인연이 있다고 못한 걸 잘한다고 하거나, 다른 직원들과 편애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직장에서 내 실력 이외의 것으로 대표님이든 그 누구든 나를 판단하는 게 싫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나, 아부 같은 건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걸 싫어하는 대표님이나 사장님들도 계셨다. 당연히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며, 대표님께는 팩트만 얘기하고, 생각이나 의견을 물어보시면 내 주관을 소신 있게 전달하고, 결국에는 나와 결이 맞는 대표님 밑에 아니, 함께 일하는 게 나의 모토다. 무조건 대표님 말에 아닌 부분에도 ' 맞습니다 맞습니다 ' 하는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는 거다. 물론 직원으로 일하는 건 함께라는 워딩과는 조금 동떨어 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최종적인 결정이나 그에 따른 보상, 책임은 대표님의 몫이 지만 결국에는 내 실력, 내 능력을 쓰기 위해 나를 고용한 거고, 나는 급여를 받는 이상으로 이 회사에 보탬이 된다면 그건 결국 파트너십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한 어쩌면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했고, 성과를 냈고, 또 대부분 내가 일을 하고 있는 한 매장이든 어디든 매출도 반응도 우상향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부분이 나의 자존감을 채워주고 있다.



입사하고 난 다음 달에 오롯이 1달 월급을 받지 못해서 몰랐지만 2번째 달에 급여가 많이 들어와 있어서 대표님께 말씀을 드렸다. '대표님 급여가 좀 많이 들어온 거 같은데 정산이 잘못된 거 같습니다. 총무팀에 얘기하면 될까요?' 하니 ' 너무 실력 있고 잘하는 거 같아서 급여 30만 원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 이 연락을 받고 온몸에 전율이... 정말 좋은 대표님이었다. 약속을 지키고,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대표님. 정말 여기에 들어오려고 내가 그렇게 고생했나 싶을 만큼 감동받았다.



직장에 다니다 보면 내가 실력이 있다는 건 대외적으로 알 수 있는 포인트가 별로 없다. 그냥 같이 일하는 직원들과 비교했을 때 내가 조금 나은 수준이라던지, 일 처리가 빠르면 '그럴지도?'라는 생각을 잠시 하는 편이고, 대표나 사장입장에서 그걸 인정해 주고 독려하면 결국에는 급여나 다른 부분을 더 해줘야 하기 때문에, 그래도 안 그런 척 쉬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열심히 잘 갈고닦았던 나를, 내 실력을 이 회사의 대표님은 잘 알아봐 주셨고,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존에 하고 있던 업무를 인계받기 시작했다.



인계를 받으며 레시피를 보니 의아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다 손을 댈 수는 없어서 그날 인계하는 제품 중 완제품 곡물 샌드위치 식빵이 있었는데, 그 식빵은 2차 발효를 식빵틀 위로 끝까지 키워도 결국에는 굽고 나와서 다시 쪼그라들고, 사이사이에 구멍이 엄청나게 많이 뚫린다고 했다. 레시피와 작업공정을 보니 빵이 안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 레시피는 수분양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믹싱을 할 때 마찰열이 많이 생기는 상태였고, 믹싱시점도 잘 잡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믹싱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재료가 섞이고, 수화된 다음에 믹싱을 계속해주며 글루텐을 잡아줘야 하는데 글루텐을 육안상 50%도 잡지 않으니 막이 생기지 않았다. 세 번째로 믹싱이 덜됐으니 1차 발효가 늦게 되지만 상태보다는 시간이 더 우선시 돼서 1시간만 1차 발효를 시켰고, 성형 후 2차 발효는 식빵틀의 끝까지 키웠다. 네 번째 2차 발효시간은 2시간이 넘어갔다. 그러니 삭은 반죽에 냄새도 좋지 않고 식감이 이 퍼석퍼석 한 건 당연했던 거다.



그렇게 그날 레시피의 수분양을 15% 이상 늘려서 조정했고, 믹싱시점을 내가 다시 봤다. 그리고 1차 발효는 시간보다는 상태에 집중했고, 성형 후 2차 발효는 틀밑에서 60%만 발효시켰고 시간은 1시간 정도 진행했다. 직원들은 '이렇게 작게 발효시키면 빵이 너무 작으면 어떻게 하죠? '라고 물어봤다. '나오는 거 한번 보고 조절해 볼게요!'라고 했고,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있었다. 나온 제품은 오븐에서 팽창하는 오븐스프링과 함께, 크기나 식감이 모두 평균 이상이었고, 색도 골고루 났다. 직원들은 그걸 보면서 다 같이 '우와~' 이렇게 합창하며 엄청나게 신기해했는데, 그 모습이 그때는 엄청나게 귀여웠고, 나도 모르게 엄마미소를 띠게 됐다. 그리고 경력이 있는 한 친구도 아직 사회 초년생이었고, 나머지 친구들도 내가 잘 가르쳐 봐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처음 입사하고 인계를 받은 날 대표님께 허락을 받고 차례로 이상했던 부분, 회사랑 맞지 않는 부분의 레시피를 점검하고, 필요 없거나 제품이 잘 나오지 않는 공정은 바꾸거나 과감하게 삭제했다. 기존에 있던 레시피들을 아예 엎어서 새로운 레시피로 재탄생시킨 제품도 있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제품을 그대로 따라 하고 똑같이 생산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모방을 좋아하지 않고 독창성 있는 것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는 예술가적 기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기본기를 갈고닦을 때는 사실 기존의 레시피나 공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을 기반으로 보완하거나 추가해서 새롭고 더 좋은 제품이나 기발한 제품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레시피 수정 보완을 하면서 입사한 지 1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인계를 잘해줬던 대리직급을 단 친구는 퇴사를 하게 됐고, 나는 과장 직급을 달았고, 직원 충원도 하게 됐고 회사 내에서 가장 힘이 없는 신생부서였던 베이커리사업부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대표님께서 미팅을 하자고 연락이 오셔서 긴장하며 대표실 앞에서 노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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