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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들이 만들어 낸 오늘

어쩌다 이어진 인연

by 재비

처음 해보는 빵집 아르바이트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야 하는 홀서빙에 비해 동선은 좁았지만

그 좁은 공간 안에 몇백 가지의 빵과 과자가 가득 들어가 있고,

포스는 있었지만, 그때 당시 가격을 모두 외워서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 포스에 입력해야 했다.

음식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과 빵을 사러 오는 손님들의 느낌은 약간 달랐다.


빵집의 매출 중에 비중이 높은 것은 팥빵이나 피자빵 같은 일반빵이 아니라

케이크이나, 롤케이크, 파운드 같은 선물용이었다. 단가가 비쌌으니까.

그래서 빵을 같이 계산하다가도 케이크쇼케이스에 사람이 가서 서있고 구경하고 있으면

다른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에게 맡기고 '케이크 봐드릴까요?'라고 다가가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케이크를 판매했다.

케익이나 선물용 제품을 판매하면 늘 뿌듯했다. '나도 한 건 했다!' 이런 느낌.


나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어서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른 편은 아니었지만, 탄탄한 느낌의 건강미 정도라고 해두자.

그런데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서 무려 13킬로가 쪘다.

내가 생각한 빵집은 그냥 식빵, 팥빵, 피자빵, 바게트 정도 파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 돈 주고 고기나 피자, 짜장면은 사 먹어도 빵을 사 먹어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일한 빵집이. 하필이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었다.

그리고 그 빵집의 사장님은 나중에 부산에서 제일 처음으로 '명장'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그때는 빵집에서 손님들에게 시식을 많이 했을 때였는데, 같이 일하던 사모님이 얘기했다.

' 빵이 나오고 가장 맛있을 때 손님에게 시식을 주면 100% 사게 돼있어 '

사장님과 사모님의 맛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시식하는 빵을 나에게 주시며 ' 먹어봐. 먹어봐야 팔지 '라고 하셨는데...

먹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때부터 먹어봐야 판다는 허울 좋은 이유로 그 빵집에 파는 거의 모든 제품을 먹어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시식이 안 되는 제품은 아르바이트 마칠 때 구매해서 퇴근했고, 집에서 빵파티를 열었다.

밥은 거의 안 먹고 3개월간 빵만 먹었다.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살이 찔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뚱뚱했지만, 새로운 맛을 알게 된 나는 기분이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미식가였다. 말이 좋아 '미식가'이지, 입맛이 까탈스러웠던 거다.

그렇다고 편식이 심하거나 못 먹는 음식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내 기준의 좋아하는 맛이 있었고, 엄마 역시도 삶이 힘들었지만, 질 좋은 재료들로 반찬을 해주셨다.

'적게 먹어도 맛있게 먹어야지'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살아와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국이나 찌개는 식으면 먹지 않았고, 간이 안 맞거나 밸런스가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음식점은 믿고 간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음식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도 있는 편이어서, '아무거나 먹자'라는 말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아. 무. 거. 나? 맛있는 거 먹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데!'


그렇게 새로운 맛에 눈을 뜬 나를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제품에 대한 이해가 늘었기 때문에 손님에게 진정성 있게 판매를 할 수 있게 됐고, 손님들도 좋아했다.

아르바이트였지만 다른 어떤 일을 했을 때보다 재미를 느끼고, 성취감이 컸던 것 같다.

누가 아르바이트 못 온다고 할 때마다 대타로 들어가서 일했더니 한 달에 320시간을 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어느 날 사장님이 물어보셨다. '니 빵 할 생각 없나?'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원래 '디자인'전공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 당시 '전공'따라 취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사장님! 저 디자인 전공인데요?'

'그런 거 니랑 안 어울린다니까? 딱 빵이 니 체질이라니까'

진짜 갑자기 나한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빵을 만드는 일이 싫다는 게 아니라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일이고, 내가 매장에서 일하면서 생산실에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그냥 절여진 배추 같았다.

새벽부터 나와서 힘들게 일하고, 그 힘듦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는...? 그래서 사장님이 물어봤을 때 그냥 거절하고 봤다.

그리고 '나는 전공 살려서 디자인으로 취업할 거야.'라는 생각이 아주 짙게 깔려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1달 정도 후 구직사이트를 뒤지다가 어떤 간판집에서 디자이너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그걸 보자마자 바로 지원을 했고, 면접까지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에 합격까지 됐다.

신입인데도 월급이 120만 원으로 많이 주는 편이었고, 수습기간은 6개월로 좀 길었지만,

아무 경력 없는 내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채용된걸 고맙게 생각해야 했다.

사모님께 말씀드리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됐고, 간판집에서 일하게 됐다.

시트지 작업, 현수막이나 인쇄물 작업, 간판 스카시 가이드 시트지 작업, 명찰이나 명함 작업 등 다양하게 했다. 그리고 나를 인계해 주던 언니는 2주 만에 그만뒀다.


간판집에서 약 1달 정도 일하다가 그만뒀는데, 큰 이유는 3가지였다.


1. 생각보다 야근이 잦았다.(간판 설치하는 볼트 너트 개수까지 재고조사 때 정리하라고 시킴.)

9시 30분 출근에 7시 30분 퇴근이라고 했는데 9시 10시에 집에 가는 일이 많았다.


2. 디자인 업무가 너무 재미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색채학, 타이포그래피, 인쇄물 디자인 등등 여러 가지 배웠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클라이언트가 시키는 대로 만들어 줘야 하는 아바타였다. 내 의지나 의사는 들어가지 않아야 했고, 나는 아무 결정권도 없었다.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 하라고 하면 그냥 해야 했다.


3. 근로계약서는 안 썼지만, 수습기간 60% 지급은 너무한 거 아니냐?

나는 수습기간에 지급하는 임금은 통상적으로 85~90%라고 알고 있었고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월급을 받았는데 73만 원이 찍혀있었다. 심지어 입사일이 애매해서 35일인가? 합산해서 받은 거였다.

그거 보고 사장한테 얘기했더니 자기는 얘기했다고 했지만, 나는 들은 적도 없었고, 경력도 없는 거 써줬더니 어쩌고 하길래. 그날 그냥 퇴근하고, 다음날 추석연휴라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그만둔다고 했다.

안된다고 하길래 그냥 연락을 안 받았는데, 부모님 욕을 막 하길래 솔직히 어린 마음에 큰일 한번 나봐라 하고 무시했었다.


나중에 그 회사에서 일하던 현장직 직원이 연락 왔었다. 책상에 있던 내 물건 챙겨놨다고 시간 나면 갖다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회사얘기를 했었는데, 나는 신입이고 그다지 큰 존재감은 없어서 다행히도 큰일은 없었다고 한다.(약간 아쉬웠다.) 대신 내 직속 상사인 계장님이 좀 힘들어하는데, 새로운 디자이너 면접을 보고 가서 곧 채용될 거라고 했다. 소식도 전해주고, 물건도 갖다 준 그 직원이 너무 고마웠다.


'지금까지 했던 내 전공이 나랑 안 맞으면? 앞으로 나는 뭐 해 먹고살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서 많이 우울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빵집 사장님 생각이 났다.

빵 사러 가는 것처럼 사장님이 계시는 시간에 빵집에 갔고, 나는 인사를 하면서 사장님께 물어봤다.


'사장님. 빵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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