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 노인과 바다
중고등학교 때 의무감에 읽었던 고전 소설들.
그중에 몇몇은 이따금 시간이 날 때 재탕을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예전에 재미없던 소실이 재밌게 읽히기도 하고,
그 나이 때는 이해할 수 없던 감성이, 지금은 격하게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
얼마 전부터, 노인과 바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어릴 적 읽었던 노인과 바다가 내 기억의 잔상으로는 '노인'과 '바다' 뿐이라 좀 지루했기 때문에다.
그런데 이번에 재탕을 하게 된 노인과 바다는.
아. 눈물 바람이었다. 이렇게 공감되고, 애잔하고 슬픈 소설이었다니!!
사실, [어부]라는 직업은 나와는 요원한 직군이라 거리가 멀었지만.
바다와 노인, 노인과 물고기의 관계가 어쩐지 직장인의 삶으로 치환되어 읽히는 부분이 있었다.
전반적인 줄거리만을 소개하자면..
이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은 한 때 유능한 어부였고, 지금도 실력 있는 어부이다. 그러나 운 때가 따라주지 않아 84일 간이나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다.
노인에게는 수습생/또는 인턴에 해당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 역시 노인의 불운으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들의 강압에 따라 다른 고깃배에서 일을 하게 되고, 노인은 홀로 남아 고깃배에 오른다.
노인은 큰 고기를 잡겠다는 꿈을 가지고 먼 바다로 나가고, 정말로 큰 물고기를 만나 며칠 밤낮으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게 된다. 마침내 물고기를 잡게 되었지만, 항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잡은 물고기를 모두 상어에게 빼앗기고 만다. 피로에 지친 노인을 소년은 위로하고 돌보아주며, 함께 고기를 잡을 것을 약속한다.
상당히 단순한 줄거리지만, 어쩐지 세상사가 모두 녹아 있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노인과 소년의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 서로를 보듬고 도닥이는 고달픈 생이 애틋했다. 소년은 5살 때부터 고깃배를 탔다고 하는데, 어린 나이부터 생업에 뛰어들었으면서도 가난을 탓하기보다는 의연하게 현재의 삶을 마주하고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마음이 감탄스러웠다. 자신의 인생 선배-이자 이제는 빛나는 세월을 다 지내버린 노인을 챙기는 마음 씀씀이도 따스했다.
그리고 실로 노인의 직업정신은 투철하다. 자신의 직업, 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의 직장인 바다에서의 하루하루, 비록 그 하루가 편안하고 포근하지 않을지언정, 혼잣말로 삶의 지탱하며,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고통에서 삶의 감각을 일깨우고 살아있는 자신을 느끼는 모습이....
그는 바다도, 그가 잡아야 할 물고기도 단순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어떤 살아있는 존재이자 존중하고 존경해야 할 가치로서 대한다. 크고 빛나는 물고기에 대해 우정을 느끼지만, 다른 삶 속에 결국 대적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진지하게 그와 사투한다. 그리고 상어에게 그를 잃었을 때,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낀다. 바다 속에서 더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그를 잡아, 결국 상어의 밥으로 내주었다는 것에 대해.
깊은 절망. 그는 이 물고기와의 사투, 영광의 승리가 한낱 꿈에 불과했다며 탄식하고, 가슴 안에 무언가 소중한 것이 깨진 것을 느낀다. 그것을 바다에 뱉어낸 노인은 자신이 이미 죽은 것처럼 느낀다.
아주 다른 삶인데, 읽으면서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이 치민다. 그는 삶을 사랑했고, 일을 사랑했고, 물고기를 사랑했지만, 결국 고된 노동의 끝에 얻은 값진 것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모두 약탈당하고 만다.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 같기도, 우리네 삶 같기도 한.. 이토록 치열한 인생이다. 많은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노력한 만큼 얻어지지는 않는 인생의 열매.
마지막. 항구에 돌아온 노인의 배에 묶여 쓸쓸히 울렁이던 물고기의 뼈에 대해 생각한다.
그 가치로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흔적만 남은.. 인생의 빛났던 순간, 스쳐간 영광에 대해.
COVER 사진은 Aleksandr Petrov 1999년에 제작한 The Old Man and the Sea 영상 중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