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노래자랑을 진행하러 떠나신 송해선생님께
# 전국 노래자랑
문을 열면 훅 하고 할머니 집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한 때 ‘제일 고물상’ 자리였던 할머니 댁에서 유일하게 보일러를 켜 둔 안방으로 들어가면 볼록한 얼굴을 가진 브라운관이 놓여져 있었다.
그 네모 상자는 하루 종일 방송을 송출하며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요리를 할 때에도, 할머니가 청소를 할 때에도, 그 TV는 항상 켜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0년 넘는 세월을 홀로 지낸 할머니의 일상에 유일하게 적막감을 감추어주는 존재가 그 TV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TV 방송 중 할머니가 유독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송해 선생님의 전국 노래자랑이었다. 주말 오후 아들과 손자가 오면 할머니는 잘 익은 묵은지에 기막히게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 점심상을 차려 주셨다. 단촐하지만 모자람 없는 할머니의 정성을 먹으며 나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3대가 나란히 앉아 전국 노래자랑을 보곤 했다.
아들과 손자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방송이지만, 할머니는 일주일을 기다린 끝에 보는 놓칠 수 없는 방송이었다. 내 기억 속 전국 노래자랑은 노래를 자랑하기 보다는 매력을 자랑하는 자리였다. 매 회마다 맛깔나는 입담을 자랑하는 매력쟁이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잔뜩 등장해 자기소개를 했는데, 특히 참가자들 중 지역 특산물이나 자기가 직접 만든 음식을 들고 나와 소개하며 그걸 송해선생님께 먹이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짓궂은 분들은 낙지 같은 생물을 들고 나와서 송해 선생님께 먹이기도 했는데, 송해 선생님의 당황스러워하는 몸짓과 거절하면서도 결국 그걸 다 받아먹으며 보이는 익살스런 표정에 할머니는 숨이 넘어갈 듯 깔깔 거리셨다.
사실 어린 내게 전국 노래자랑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상적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건 못 부르건 거의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노래를 마친 후 ‘딩동댕동댕’하면서 합격 점수를 받았는데, 당시에 나는 그 결과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 저 사람도 합격이야?’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참가자 열에 여덟 아홉은 대부분 합격이었다. 그 광경이 어린 내게 매번 낯설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우미양가’ 중 정말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만 ‘수’를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우미양가’ 중 하나를 받았다. 음악 시간에도 피아노를 말도 안되게 잘 치는 학생들만 칭찬을 받았지 나머지는 주목받지 못했다. 미술시간에도 내가 보기엔 ‘저건 선생님보다 더 잘 그린게 아닌가’ 하는 아이들만 칭찬을 받았다. 행글라이더를 날려도 ‘이건 비행기보다 더 오래 날았다’ 싶을 정도로 날린 아이들만 칭찬을 받았고, 과학상자도 ‘저걸 쟤가 만들었다고?’ 싶을 정도로 만들어야 선생님 눈에 띌 수 있었다.
이 무렵 국민학생 류재언에게 있어 칭찬이나 합격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이라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 집에서 보는 전국 노래자랑은 웬만하면 모두 ‘딩동댕동댕’하고 합격 점수를 받았고, 심지어 노래보다 춤에 집중을 해서 자아도취한 채 춤을 추다가 음 이탈이 난 참가자에게도 모두가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며 합격 점수를 주고 있었다. 후해도 너무 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한 평가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전국 노래자랑이TV에 나오면 돌아가신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자극된다. 아버지 손을 잡고 보던 그 방송을 아버지가 되어 보게 될 때까지 전국 노래자랑은 참가자들의 노래가 끝나고 나면 “딩동댕동댕”하고 합격을 선물하고 있었다. 수십년간 전국 노래자랑의 국민적 사랑을 이끌어온 송해 아저씨의 변함없는 에너지 만큼이나 변함없는 사실은, 어릴 때도 그렇고 사회생활을 십수년 해온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저렇게 참가자들에게 우호적이고 합격을 많이 주는 평가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대학 시험을 쳐도, 회사 면접을 봐도, 주택청약을 신청해도 모두 떨어뜨리기 위한 평가가 당연시되어 왔다. 사람으로 태어나 배우고, 일하고, 안전한 주거환경에서 살아가는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해야 할 권리들 마저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서 다른 경쟁자들을 다 떨어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구조가 우리 일상의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이 치열한 경쟁구도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지 못하면 무능한 내 탓이 되어 버리는 분위기가 조성된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우리는 전국 노래자랑에서 만큼은 ‘땡’ 소리가 아닌 ‘딩동댕동댕’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탈락시키기 위한 평가가 아닌 합격을 주기 위한 평가. 우열을 가리는 심사가 아닌, 각자가 자신의 매력을 한껏 보여줄 수 있는 심사. ‘땡’과 불합격이 남발되는 분위기가 아닌, ‘딩동댕동댕’과 합격이 당연시되는 분위기. 그것이 생존 경쟁에 내몰린 절실한 국민들에게 전국 노래자랑이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며, 참가자들과 청중들이 느끼는 낭만과 편안함의 원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달전, 끄적여본 글인데,
오늘 송해선생님이 '천국 노래자랑'을 진행하시러 먼 길을 가셨다해서,
공유해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