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7일의 이야기, 그리고 그후 9년..
2013년 9월 7일. 성북동 깊은 산 어느 장소에서 서한이와 류재언은 결혼을 했다. 2002년 9월에 서로 처음만나 2002년 12월부터 연인이 되었으니, 만난지 11년만에 연인이 부부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내는 오랫동안 그 순간을 기다려 왔고, 머리 속에 본인이 원하는 결혼식을 그려왔다. 야외 결혼식을 원해서 성북동 산 속 어딘가 한 때 미술관이었던 공간을 빌리기로 했고, 웨딩드레스는 결혼식 몇 개월 전 시드니 배낭여행을 가서 길가에 있는 웨딩샵에서 당시 사회초년생 직장인으로서는 거금인 1000불을 주고 미리 사두었다.
야외 결혼식은 날씨가 최대 관건. 그런데 하필 당시 역대급 기세를 자랑하던 태풍 매미(MAEMI)가 엄청난 기세로 한반도를 뒤 덮었었고, 우리는 PLAN B를 가동하기 위해 결혼식장의 지하 공간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다행히 태풍 매미는 결혼식 일주일 전 일본으로 방향을 틀어 빠져나갔고, 태풍이 지나간 9월 맑고 높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성북동 뒷산을 감싸 돌고 있었다.
고향이 서울이 아닌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인지라, 멀리서 올라온 하객들이 많았다. 부산에서, 진주에서, 대구에서, 안동에서. 아내 대학 동기들은 지구 반대편 몬트리올에서 한국까지와서 우리의 결혼식을 함께했다. 가족, 친구, 동료, 고등학교 은사님까지.
우리 둘을 축복해주기 위해 모인 고마운 이들이 내뿜는 에너지로 성북동 전체가 가득찬 느낌이었다.
장인어른이 푸른색 도포를 입고 나타나 두 사람의 성혼을 선언해 주셨다. 장인어른은 특유의 여유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띄고, 한국어로, 영어로, 그리고 불어로 성혼 선언을 해주셨는데,
장인어른의 장난끼를 익히 아는 아내의 몬트리올 친구들은 불어로 성혼 선언을 할 때 킥킥 거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성혼이 선언되었을 때는 모두가 온 마음으로 축복의 박수를 쳐주었다.
그렇게 결혼식 1부를 마치고, 2부에는 식사와 함께 현악기 4중주 공연과 축가, 그리고 나와 아내의 수줍은 듀엣송도 준비되어 있었. 제이슨 므라즈(Jason Mraz)의 럭키(Lucky)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는데, 노래 가사 중
Lucky I'm in love with my best friend
라는 부분은 그 때도 아직도 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다.
인생 최고의 친구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리게 되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강렬하게 반짝이던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오후 늦게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계속된 그 날의 여운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결혼식을 모두 마친 밤 9시 무렵. 새벽부터 온 신경을 쏟느라 둘 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서 뭘 먹을까 하다가, 둘이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우리가 2002년 가을에 처음 만난 대학로로 가기로 했다.
둘이서 차를 몰고 대학로로 가서, 턱시도와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대학로를 거닐었다. 사람들이 쳐다보았는지 어땠는지 사실 기억나진 않는다. 그날은 아내와 나만 생각했던 그런 날이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갔다. 대학로 골목길 한 켠에 80에 가까운 노모와 딸이 함께 하는 포장마차 멸치국수집. 음식이 깔끔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학창시절부터 아내와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곳이었다.
“어머니, 저희 결혼했습니다.”
맨날 추리링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야식을 먹으러 오던 둘이,
토요일 밤에,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나타나니 국수집 할머니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오늘 둘이 결혼했다고?”
“네, 어머니. 저희 결혼했어요!
결혼해서 첫 끼를 여기서 먹게 되네요.”
아내와 나의 부부로서 첫 끼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멸치국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결혼식 때 잔치국수를 먹는데, 정말 둘이 가장 좋아하는 멸치국수를 잔칫날 저녁 오붓하게 함께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그 해의 그 날이 지나갔다. 지금도 대학로 어딘가를 갈 때, 멸치국수를 먹을 때, 가을 태풍이 올라올 때, 제이슨 므라즈의 럭키가 라디오에서 들릴 때, 그 날의 기억이 오버랩 되곤 한다.
2023년 9월 7일이면 결혼한지 10년이 된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아내에게 2013년부터 효력이 발생된 결혼계약을 앞으로 10년간 다시 연장할 의사가 있는지 묻기로 되어있다.
나에게는 계약갱신 청구권이 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계약갱신 청구 거절권이 있다.
결국 이 결혼계약의 갱신 합의를 할 것인지 여부는
아내의 수락여부에 달려있다.
그날 아내가 우리의 결혼계약 갱신에 동의한다면,
그날 저녁 나는 아내와 오붓하게 멸치국수를 먹을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잔치 2막이 시작되는 날은, 대학로에서 첫 잔치국수를 먹을 때에는 없었던 게스트 3명도 초대할 것이다.
선율이와 선웅이와 이도.
우리 둘의 잔치에 기꺼이 함께 해줄 것이라 믿는 소중한 세명의 게스트들과 흡족한 마음으로 멸치국수를 함께 먹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P.S. 지난 수요일. 결혼식 9주년을 아내와 함께하며, 계약갱신을 위해 남은 1년을 더 잘해야겠다고 각성하며 적어본 글 ㅎㅎㅎ 다들, 행복한 추석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