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신주 카페 Coffee Berry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것들이 있지만요, 이따금 우연히 찾아오는 선물같은 순간이 있잖아요. 그것이 나를 살게해요.
간판이 없어요. 언뜻보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곳. 문을 열면 신세계가 펼쳐지죠.
주말이다. 누워있다가 필름카메라를 덜렁 메고 나왔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처음 와보는 낯선 거리 속을 걷고 있다. 한국은 가을이라는데 여기는 33도로 뜨겁다. 간판없는 가게 안의 초록색 커피머신이 눈길을 끈다. 방금 전에 커피를 마신 터이지만 어느새 내 손은 문을 열고 있다.
나를 사로잡은 1960년대 엔틱 커피머신
직감이라는게 무섭다. 문을 열자마자 웃음이 터진다. 내가 좋아하는 끝이 닳아있는 투박한 빈티지 가구들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대만의 조용한 공업도시인 신주는 대체로 정갈하고 고요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흐리끄리한 녹색으로 온 도시가 가득 차있다. 역, 주택, 공원의 벤치까지 여기저기 에메랄드색으로 둘러쌓여있다. 덕분에 이 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분해지는듯하다.
벽을 뚫고 내려온 것처럼 보이기위해 전선을 하얗게 칠한 디테일이 좋아
여러가지 초록들에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호탕해보이는 사장님이 말을 거신다. 그리고 이 초록색이 1960년대 대만에서 유행하던 컬러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본인도 빈티지 가구를 굉장히 좋아한다며 가게의 전등, 탁자, 의자, 로스팅 기구를 하나 하나 설명해주는걸로 모자라 이것들을 구매한 타이페이의 한 고상점도 소개시켜줬다.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유쾌함 덕분에 나까지 간만에 에너지가 샘솟는 대화를 했다.
주인장님이 폴란드에서 사왔다는 엔틱 그라인더
대화를 나눌수록 커피가 기대된다. 많은 종류의 원두가 있고 로스팅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적당해보이는 추천메뉴를 골랐다. (Panama Boquete Duncan / White Honey ) 먼저 원두의 그라인딩 정도를 확인시켜주고 향을 맡아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계량해서 드립을 내렸다.
오묘했다. 달큰하니 드립에서 느낄 수 없는 약간 태운듯한 묵직한 맛. 홀짝 홀짝 금새 마셔버렸더니 이번에는 다른 로스팅 방법으로 태운 원두를 맛보라며 가져다주신다.
털털 소리가 날것 같은 로스팅머신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것 같은 패브릭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엔틱게임기. 어떤 원두를 고를지 결정장애를 가진 손님들은 이 게임기에서 커피를 뽑는다고 한다. 역시 그 타이페이 빈티지가게에서 사셨다고. (ㅋㅋ) 이쯤되면 당장 그 가게에 가고싶어진다. 이런 일상의 게이미피케이션를 주는 삶의 태도를 참 좋아한다.
윈도우 기본 게임에서만 보던건데!
풍만하고도 쓸쓸한 해질녘
이것 저것 맛보고, 이야기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하니 대만의 큰 명산이라는 양밍산에서 직접 채취해서 말린 티를 선물받았다. 참, 저한테 왜이러세요! 이러시면 행복하잖아요.
1달이 넘는 시간동안 여기저기를 쏘다녔고 슬슬 마무리가 되어간다. 이 초록 빛깔을 소중히 품어가야지.
신이 나셔서 타이페이 커피 넘버원 인증하셨다. 어찌 여길 들어오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