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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May 12. 2021

'옥에 티'가 명품을 가른다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과거 기사를 읽다가 '옥에 티'를 발견했다. 눈치 챈 독자는 별로 없을 듯하다. 

예전에 중앙선데이에 실렸던 왕년의 축구 스타 이회택 전 축구협회 부회장의 인터뷰 기사다. 이 전 부회장의 축구인생부터 축구 원로로서 그가 생각하는 후배들에 대한 평가를 담아냈다. 축구전문기자가 쓴 인터뷰 기사답게 질문도 좋았고 내용도 알찼다. 그런데 기사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곁가지가 자꾸 거슬렸다. 


인터뷰 장소는 이회택 전 부회장의 모교인 서울 동북고등학교. 이 전 부회장이 학교 운동장과 건물을 배경으로 서있는 사진도 실렸다. 기사는 "이 전 부회장을 그의 모교인 서울 송파구 동북고등학교에서 만났다"고 적었다. 


사실 동북고등학교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다. 원래 서울 중구 장충동에 터를 잡았다가 다수의 사립 고등학교들이 그랬듯, 1980년대초 한강을 건너 지금의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전했다. 한때 송파구가 강동구였던 적은 있지만, 동북고등학교가 위치한 둔촌동이 송파구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전 부회장은 장충동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옥에 티를 걷어내고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회택 본인이 만약 해외에 진출했더라면 성공했을 것으로 보느냐고 질문한 대목이었다.  


Q : 차범근처럼 유럽에 진출했다면?
A : “기량이 문제가 아니라 사생활이 문제였죠. 스물한 살 때 이미 무너졌으니 세계 최고 선수들이 경쟁하는 자리에 갈 수 있었겠냐고. 난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국가대표가 된 이후 한 번도 후보로 벤치를 지킨 적이 없었어요. 선배들이 워낙 나를 예뻐해서 ‘스타는 공만 잘 차선 안 된다. 술·오락·연애 등 못하는 게 없어야 한다’며 여기저기 끌고 다녔죠. 차범근이 독일에서 성공한 가장 큰 요인은 부인(오은미 여사)을 잘 만난 겁니다. 축구 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줬잖아요.”


'기량이 아니라 사생활이 문제다' 

20대나 30대 때 저런 답변을 들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무심코 흘려들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좀더 들고 보니, 저 말이 핵심을 찌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회택 본인은 아예 해외 무대를 밟지 않았다 해도, 지금껏 그런 사례들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왕년의 스포츠 스타들을 떠올려 보면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충분히 성공하고도 남았겠다 싶은 재목들이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투수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을 꼽겠다. 공부 못하는 대학생을 가리키는 선동열 학점(0점대 방어율)이란 표현이 말해주듯 국내 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쌓았고, 전성기를 지나 진출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마무리 투수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진출 타진이 이뤄지기도 했다는데,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면 류현진보다 잘했을까'라는 식의 질문은 아이언맨이랑 캡틴 아메리카가 붙으면 누가 이기냐'는 질문처럼 (결국 둘은 '시빌 워'에서 맞붙지만) 야구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될 법한 주제다. 


개인적으로 재능만 놓고 보자면 여전히 선동열을 최고로 치지만,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했을까' 라는 질문 앞에선 언제부턴가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선동열을 둘러싼 무용담에는 항상 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최동원과의 명승부를 그린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도 시합 전날 몰래 술집을 찾는 모습이 나온다. 모범생 스타일의 최동원과 달리 선동열은 국내 대표적인 '두주불사'형 선수였다. 술 마신 다음날 경기를 일찍 끝내려고 스트라이크만 던지는데도 상대 타자들이 못 쳤다느니, 대학동기 정삼흠과 등판 당일 새벽까지 술을 먹고도 완봉승을 거뒀다는 등의 얘기가 여전히 회자된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선동열의 천부적인 재능을 돋보이게 해주는 사례지만 그가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 국내 프로스포츠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회택 전 부회장 얘기처럼 ‘스타는 공만 잘 차선 안 된다. 술·오락·연애 등 못하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게 당시의 시대정신이었고, 사실상 해외 선수들과의 경쟁이 없는 상황에서 국내 최고 수준에 오른 선수들은 운동 이외의 '잡기'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라스트 댄스>를 보면 마이클 조던이 대학을 졸업하고 NBA로 진출할 때 (물론 최상위권이긴 했지만) 그는 1순위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당시 3류였던 시카고 불스를 전설적인 구단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재능에 더해, 동료들의 관행에 물들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스트 댄스에서 마이클 조던은 신입 때 선배 선수들의 방에 들렀다 이들이 마약을 하며 노는 것을 보고는 그 날 이후로 다시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3류였던 시카고 불스의 기존 문화에 물들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문화를 일궈내 결국 왕좌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마이클 조던처럼 일가를 이루는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대개 금욕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리관리에 철저하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더이상 남들과 차별화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단거리 천재들이 모인 마라톤 경기에서 결국 승자는 100미터를 좀더 빨리 뛰는 이가 아닌,  부상 없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 관리가 느슨해지는 순간, 내리막이 시작된다. 



인기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거품 위에서 화려한 삶을 구가하는 연예계에서는 거품이 꺼지는 순간 '급전직하'하기 마련이다. 어제의 찬사는 순식간에 지탄으로 바뀌고, 대중은 이 과정을 손바닥 뒤집듯,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쉽게 해낸다. 

이런 연예계에서 장수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결국 자기관리에 성공한 이들이다. 모범생 이미지의 유재석은 말할 것도 없고, 넘을 듯 말 듯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 신동엽, 한때 탈세 의혹이 제기됐지만 결국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강호동까지 프로그램 바깥에서는 좀처럼 스캔들을 만들지 않는다. 


최근 인상적이었던 건 상대적으로 과격한(?) 이미지에도 무려 40년간 기복 없이, 꾸준히 TV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개그맨 이경규씨다. 그는 얼마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40년 동안 기복 없이, 잡음 없이 활동한 비결'을 묻자 “‘나대지 말자’는 게 소신이다. 섣불리 세상에 대해 글을 올린다든지 생각·시각을 드러낸다든지 하지 말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제일 조심하는 건 음주운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양심냉장고’를 했기 때문에 정말 절대 안 된다. 술 약속은 집 근처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서만 잡는다"고 말했다. 



유명인의 사생활을 '옥에 티' 정도로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명품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건 옥에 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옥에 티에 관대했다. 그 정도 재능에 그만한 티도 없으면 인간미가 없는 것이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옥에 티에 돋보기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예전의 잣대로는 허물이라고 보기 힘든 일들로 인해 한순간 성공의 계단에서 추락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미 변해버린 세상의 기준에 맞서 이길 재간은 없다. 


장기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이들은 이제는 누구나 체감하게 된 옥에 티의 무서움을 진즉에 간파하고 대비한 이들인지 모르겠다. 자의든, 타의든 세상 무서운 줄 알고 진즉에 몸을 낮춘 이들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결국 유재석의 최대 강점은 유머나 원숙한 진행이 아니라, 상황에 맞지 않는 유머를 함부로 날리지 않는 자기 절제에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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