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은 세월을 이겨낸 음식이다. 피자나 돈가스도 흔치 않던 시절,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한결같이 짜장면을 꼽았던 건 맛도 맛이지만 별다른 옵션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주공산에서 왕 노릇 하던 짜장면이 한 세대를 지나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메뉴에서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루는 아들이 안쓰럽다는 듯 묻는다.
“아빠가 어릴 땐 지금 같은 컴퓨터 게임 같은 거 없었지?”
“응” (굳이 말하자면 ‘재믹스’란 게임기를 보유한 얼리어답터들이 있긴 했다.)
“TV도 채널이 몇 개 없었지?”
“응.” (KBS, MBC, EBS, 그리고 지금은 없는 AFKN이 다였지.)
"그럼 뭐 하고 놀았어?"
"..."
그래도 그때도 짜장면은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짜장면을 닌텐도도 넷플릭스도 가진 우리 아들도 좋아하는 걸 보면 세상은 나름 공평하단 생각이 든다.
요즘 소위 핫하다는 곳들은 대개 오래된 주택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세가 싸고, 주택을 식당으로 개조할 경우 비교적 규제를 덜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청동, 가로수길부터 연남동, 이태원, 신용산역 주변, 그리고 해방촌이 그렇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해방촌은 기존 주택가, 골목길 상권에 더해 ‘뷰(View)'까지 갖췄다. 예전 같으면 외지고 길 찾기도 어려워 외지인들이 발 들여놓기 힘들 법한 동네에 상권이 형성되면서 사진 찍기 좋은 전망 좋은 가게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해방촌에 자리 잡은 한 햄버거 가게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발밑 풍경은 이 가게의 비싼 햄버거 가격을 눈감아주게 만든다.
해방촌 오거리에 위치한 ‘복만루’는 고지(高地)에 위치한 해방촌의 뷰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전혀 아니다. 사실 상기한 햄버거 가게를 찾아가던 길목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걸 보고 한번 가봐야겠다 싶어 찾게 됐다.
첫인상은 ‘친절하지는 않구나’였다. 인근에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가게 앞 도로에 차를 대놓고 주차해도 되는지 물었더니 “딱지 떼도 모른다”는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방에 자리를 잡으면 창문을 통해 내 차 상태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주차해 놓은 차 옆으로 가끔 덩치 큰 트럭이 지나갈 때면 노심초사하게 되는 건 불행이다.
코팅된 한 장 짜리 메뉴판은 엉성한 듯 영악하다. 세트메뉴에 탕수육과 짜장면을 묶어서 1만5000원을 매겼는데, 이름이 ‘1인셋트’다. 혼자니까 짜장면만 하나 먹어야지 싶다가도 ‘1인셋트’란 작명에 마음이 흔들리기 십상이다.
우리 나이로 9살인 아들은 좋아하는 메뉴에 따라 가끔 성인 1인분 몫을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식사량을 0.7인분 정도로 봐야 한다는 게 가족 내 중론이다. 내가 허리띠를 살짝 푸르고 1인분을 다소 오버하더라도 부자가 2인분을 주문하면 적당하다. 즉,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 끽해야 만두 하나 추가?. 하지만 ‘탕수육+짜장면=1인셋트’에 교동짬뽕을 추가해 버렸다. 1인셋트란 프레임에 낚인 것이다.
음식이 나오는 순서도 친절하지 않았다. 짜장과 짬뽕이 먼저 나오고, 곧바로 탕수육이 나왔다. 탕수육엔 소스가 부어져 있었다. ‘부먹’이냐 ‘찍먹’이냐,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종업원의 기세에 눌렸는지 평소 자신은 찍먹이라던 수다쟁이 아들은 이날 따라 찍소리조차 없었다.
갓 튀겨 나온 찹쌀탕수육은 바삭했다. 튀김옷 속에 감춰진 고기도 제법 두툼했다. 다만 소스를 부어서 내주는 바람에 바삭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릉 ‘교동반점’을 원조로 전국 5대 짬뽕이라는 별칭이 붙은 ‘교동짬뽕’은 불맛이 났고 부추 위에 뿌려진 가루에서는 독특한 향이 났다. 후추 비슷한 이 향신료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역시 기세에 눌려 끝내 말문을 열지 못했다. 탕수육이나 짬뽕 모두 맛은 만족스러웠다. 아들 몫으로 나온 짜장면도 기본에 충실했다.
사실 언제부턴가 짜장면 맛은 어딜 가든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언젠가 방송에서 이연복 셰프가 우리나라 중국음식점의 90% 이상이 특정 브랜드의 춘장을 사용한다고 하던데, 이처럼 대다수 중국집이 짜장의 핵심인 춘장을 공유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어느덧 전국의 짜장면 조리법이 상향 평준화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예전엔 짜장면 맛의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던 혀가 짜장면 말고도 먹을 게 너무 많아진 환경 탓에 다소 무뎌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짜장면을 먹으면 반드시 입가에 흔적을 남긴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주고, 소스에 절은 탓에 싸가지도 못할 탕수육 하나를 더 건저 먹고 방을 나섰다. 그나저나 아들이 짬뽕은 몇 살쯤부터 먹을 수 있으려나.
[오성 별점]
★★★
[재방문 의사]
다음엔 3명이 온다면. 각각의 짜장, 짬뽕에 '1인셋트'용 탕수육을 성인 둘, 아이 하나가 나눠 먹으면 딱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