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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수 Jun 25. 2019

다시 만난 <어린 왕자>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물음

스무 살 어느 날, 삶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그걸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고 답답했다. 이전까지 내 삶은 내게 주어진 숙제를 해내는 것이었다. 학교 숙제든 뭐든 항상 문제가 주어졌고 내 마음은 그 숙제를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책임은 언제든 던져버릴 수 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처럼 느껴졌다. 삶을 가득 채우던 책임감이 사라진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지 못했다.


큰 물음을 마주한 이후부터 내 삶은 달라졌다.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책에 몰두하고 선배들에게 물었지만 명확한 답은 없었다. 같은 질문과 고민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을 만났다. 종교를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답이 없어도 하루하루의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어디로든 움직여야 언젠가 답을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른다고 삶의 의미가 그냥 다가오진 않는다. 잊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벼락처럼 그 질문이 내게 다시 나타나 물었다. 너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냐고. 버티기만 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의 의식은 잊어버렸지만, 내면의 무의식은 그 질문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어린 시절 몸에 침투했던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하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생생함이 희미해지면 다시 찾아와 나를 옥죄기 시작한다. 스무 살의 나를 다시 소환해서 왜 그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물어본다. 그렇게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났다. 




 “그들이 찾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 발견될 수도 있어…”


어린 왕자는 작은 별에서 살고 있다. 한동안 그에게 심심풀이라고는 해 질 녘의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경치뿐이다. 하지만 그 별은 너무 작아 의자를 조금만 뒤로 물려 놓으면 언제든 그가 원하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작은 별이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별을 위협하는 바오밥 나무가 자라지 못하도록 싹을 뽑아내고 작은 화산들을 청소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장미가 있다. 그는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주며 정성껏 돌본다.


이런 얘기를 어른들에게는 다르게 설명해야 이해시킬 수 있다. 그의 별은 1920년 터키의 한 천문학자가 발견하였고, 소혹성 B612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숫자를 몇 개만 사용하면 어른들은 그게 진짜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별에 누가 살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가 힘들다. 어릴 적 자기 자신과의 대화조차 쉽지 않다. 



장미의 가시는 무엇에 소용되는 거지?”


지구의 사막에서 만난 ‘나’에게 어린 왕자는 이렇게 묻는다. 나는 비행사다. 어릴 때 그림을 좋아했지만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른들 때문에 그 꿈을 포기했다. 이후로 ‘나’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불시착한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난다. 어린 왕자와의 대화를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품었던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비행기 수리에 지쳐 있던 나는, 가시는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장미가 공연히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고 말해 버린다. 어린 왕자는 화가 난다. 왜 비행기를 고치는 일은 중요하고 장미의 가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어린 왕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어른들과 공감하지 못한다. 이미 수백만 년 전부터 양은 꽃을 먹어 왔고, 꽃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만들어 왔다. 그건 양과 꽃들의 전쟁이었다. 작은 가시 하나에도 많은 시간과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굳이 진화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생명은 오랜 시간을 살아남았다. 작은 가시 하나라도 그 생명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 의미를 쉽게 지나칠 수는 없다.  



나는 꽃을 한 송이 소유하고 있는데 매일 물을 줘. 세 개의 화산도 소유하고 있어서 매주 그을음을 청소해주곤 하지. 내가 그들을 소유하는 건 내 화산들에게나 내 꽃에게 유익한 일이야. 하지만 실업가 아저씨가 별을 소유하는 것은 별들에게 유익하지 않잖아.”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친 어른들은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별들을 여행하며 만난 어른들의 모습은 그가 기대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반복하며 강조하지만, 어린 왕자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첫째 별에서 만난 왕은 혼자만의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려 하고, 허영심에 빠진 둘째 별의 어른은 모두가 자신만을 찬양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 이후로 만난 어른들도 이상하고 한심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술꾼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있고, 실업가는 쓸데없는 계산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술꾼이 술 마시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하는 것처럼, 실업가는 다른 것을 더 소유하기 위해 부자가 된다고 말한다. 어린 왕자는 소유하는 대상에게 유익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실업가에게 묻는다. 소유하고 관리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어른들이 별을 소유한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별의 개수를 세는 일뿐이다.


생각해 보면 어린 왕자는 어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질문들을 여전히 갖고 있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다. 우리 모두는 어릴 때 무엇이든 궁금했고 무엇이든 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갈수록 질문을 잊어버린다. 호기심을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기보다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다. 술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또는 소유하기 위해 소유한다는 모순된 말도 모순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인다. 오랜 시간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게 당연하게 보인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주어진 것을 해내야 하는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 질문들은 차츰 기억의 무덤 속에 갇혀 버린다. 


과거의 호기심을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릴 적 자신의 질문을 잊지 못한 ‘나’는 과거의 자신을 소환한다. 그리고 묻고 싶었던 것을 다시 묻는다. 더 이상 잊어버린 채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에 답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지…”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만난 여우에게서 의미 있는 답을 찾는다. 사막의 황량함에 쓸쓸해진 그가 여우에게 놀자고 제의하지만 여우는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으니까” 함께 놀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라고 얘기해주자, 그는 자신의 별에 있던 꽃이 자신을 길들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장미꽃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 주었다. 정성껏 돌보았지만 장미는 그에게 차갑기만 했다. 게다가 장미는 몸에 가시를 지니고 있어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장미를 두고 떠나는 이별이 매우 힘들었다.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장미와의 관계가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여우는, 어린 왕자가 자신을 길들인다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밀밭을 볼 때마다 그의 금빛 머리칼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오후네 시에 만나기로 한다면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라 말한다. 그런 대화 속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길들여지고 여우와의 헤어짐을 슬퍼한다. 그리고, 그의 별에서 자신이 장미꽃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그 꽃을 위해 자신이 쏟은 시간 때문임을 알게 된다. 




한 순간의 깨달음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깨달음은 삶의 방향을 보여주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은 깨달음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 어린 왕자와 새로운 관계를 만든 여우의 삶은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진다. 여우는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카락과 같은 색깔의 보리밭을 보며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와 만나기로 하면 약속 시간 이전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을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린 왕자는 여우와의 관계를 통해 길들임의 의미를 이해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에게는 그의 별이 있고 그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나는 그 꽃에 책임이 있어!” 그래서 자신의 별로 돌아간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감은 과거의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뱀의 도움을 받아 사라진다. 사라지는 순간 과거의 어린 자신은 사라지고 현재의 자신과 하나가 된다. 과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음으로써 ‘나’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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