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음에 직면한다. 죽음 앞에선 모두 힘을 잃는다. 삶의 대한 의문도 마찬가지다. 삶에 대한 물음은 결국 죽음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삶의 이유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생각하면 아쉽고 갑갑하다. 죽음을 생각하면 유한한 우리 모두의 삶에 연민이 생긴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고 이기려고 했는지 허무한 마음이 든다. 우주 속의 먼지로 왔다가 다시 그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어느 모임에서 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나의 마지막 말을 정리해 본 적이 있다. 결국 가족과 친구처럼 나와 함께 살며 마음을 나누었던 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가장 많았다. 특히, 살아계실 때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고 임종도 못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마지막도 이랬을까?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했던 죄송함은 끝까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느끼는 이 외로움을, 우주 속 먼지로 돌아가는 쓸쓸함을 아버지도 느끼고 있었을까?”
죽음이 잠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의학기술의 발달로 그렇게 죽어가는 것도 어렵다. 온갖 약으로 지탱하다 심하게 삐걱거리는 곳이 생기면 수술을 하면 되고, 쉽게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면 새로운 약과 기술을 테스트해보려는 의사들이 나타날 것이다. 내 몸이 늙고 무너져 삶을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울 때 과연 나는 어떤 활동만으로도 삶을 유지하고 싶을까? 맥주를 마시며 TV를 볼 수 있다면 충분할까? 그걸 미리 결정해 두지 않으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환자실에서 온갖 기계장치의 도움을 받으면 생명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도 늘 주변에 있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가족 전체의 존경을 받았다. 사회의 변화 속도는 빠르지 않았고 노인들의 경험과 지혜는 자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특히 농촌에서는 정년퇴임이라는 것도 없이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일을 계속할 수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병세가 나타나거나 사고가 나면 죽음을 맞이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고령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런 노후를 보냈다. 특히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대가족 시스템에서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존경과 보살핌을 받았다.
이제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졌고 대가족으로 살아가는 방식도 버린 지 오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온라인 상거래의 발달로 노인들은 ‘존경받는 대상’에서 ‘따라오지 못하는 존재’로 지위가 급락했다. 오랜 경험과 노련한 판단의 가치가 크게 퇴색되어 버렸다. 이제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검색을 해서 지식을 찾거나 동영상으로 노하우를 배운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젊은이들은 고향 마을을 떠났고 대가족은 해체되었다. 노인들은 이제 자녀들과 함께 사는 경우가 드물고 배우자 없이 혼자 살고 있는 경우도 많아졌다. 재력이 있는 노인들은 소위 ‘은퇴’를 하고 여가를 즐기는 삶을 산다. 굳이 자녀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고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맞게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문제는 독립적인 삶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면 언젠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점이 현대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다.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하다. 나는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한 가지 병으로 죽는 게 아니라 한다. 의학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여기저기 보수하고 고쳐가며 유지하다가 신체 기능이 종합적으로 무너지게 되면 죽음에 이른다. 우리 세포의 DNA는 일상적으로 자주 손상되지만 세포 속에는 여러 개의 DNA 수선 장치가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시스템 안의 결함이 점점 늘어나면 결국 한 군데만 더 고장 나도 시스템 전체를 악화시키는 시점이 온다. 수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유전은 오히려 아주 작은 요인에 불과하다. 부모의 키가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은 거의 90%인데 반해 수명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허물어질 뿐이다.
노인 인구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상당수 의사들은 노인을 돌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러 증상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의사는 없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눈이 어둡고 귀가 잘 들리지 않으며 기억력도 가물가물하다. 한참을 설명해줘도 다시 말해달라고 한다. 수 십 년간 계속된 당뇨와 고혈압, 관절염 같은 증상을 한 몸에 가진 환자를 돌보는 건 전혀 매력적인 일이 아니다.
그래서, 노인병은 고친다기보다 관리하는 것에 가깝다. 노인건강을 전문으로 다루는 의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얼까? 가장 목숨에 위협이 되는 증상(암)에 초점을 맞추거나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증상(요통)을 완화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주로 발을 먼저 살핀다. 실제로 노인의 발을 살펴보면 발에 손이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힐 수 없어서 몇 주째 발을 씻지 못한 경우가 있다. 전체적인 관리가 안되고 현실적인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위험은 바로 넘어지는 것이라 한다. 매년 35만 명의 미국인이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고 그중 40%가 요양원에 들어가며 20%는 다시 걷지 못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방식을 잃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오랫동안 지내던 집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노인들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도 집을 떠나는 게 너무 싫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보스턴의 한 요양원에 입주한 89세 앨리슨 할머니는 보통 자녀들의 권유로 들어오는 경우와 달리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들어왔다. 그녀는 심부전과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최근 몇 번 넘어진 이후로는 집에서 혼자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요양원도 본인 스스로 선택했다. 직원들은 친절하고 딸의 집과도 가까웠다. 하지만, 요양원에서의 삶은 보통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차이가 커서 견디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요양원에서 자기만의 삶을 찾으려는 노인들과 운영자들 사이에 마찰이 발생한다. 운영자들은 안전과 규칙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노인들은 시간표에 따라 약을 먹거나 생활하는 걸 거부한다. 어느 요양원이든 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고사하고 그들 옆에 앉아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 관해 고민하지 않는 사회가 낳은 결과다. 노인을 위한 시설과 제도들은 빈곤한 노인들을 돕고 가족들의 부담을 덜어준다. 하지만 그 시설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정작 중요한 삶의 방식에는 관심이 없다.
앨리슨 할머니는 결국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심장이나 호흡이 정지해도 그녀를 되살리기 위한 시술을 하지 않는다는 ‘소생술 포기’ 의사를 밝히는 서류에 서명을 한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복부에 통증을 느끼고 피를 토했지만 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우리가 직면하는 한계와 역경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의 자율성 또는 자유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다.”
우리는 남에게 이끌려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율성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며 살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그러한 권리 체계가 허용되는 한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는 거다.
빌 토머스는 자신이 근무하게 된 요양원의 거주민들이 무료함, 외로움, 무력감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말이나 여유 시간이 있으면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구속과 규정으로 가득한,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요양원의 삭막함이 끔찍하다. 그래서 그는 요양원에 생명을 들여놓기로 결심한다. 개 두 마리,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잉꼬 백 마리로 시작했다. 처음 동물들이 들어오는 날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직원들이 잉꼬들을 새장에 넣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자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이후로 그 생명들을 돌보고 키우는 일들에 거주민들이 조금씩 참여하게 되고 그들은 생명력을 되찾는다. 생명과 그 생명을 위한 일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준 것이다.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다른 중요한 일이 많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기술에 의존한 대응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을 최우선에 둔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한다 해도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반면,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환자가 살날이 많이 남았는지 적게 남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호스피스 케어를 받겠다고 선택한 시점에도 환자는 자신이 치명적인 질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여전히 병을 이기고 싶어 한다.
죽음에 맞서 싸우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대부분의 우리는 의사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할 때까지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제나 무언가 할 일은 있다. 계속 뭔가를 찾아서 하라고 지시하는 자동모드를 켜놓고 그 뒤에 숨어 버린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계속되는 현대의 비극이다.
죽음은 돌아감이다. 부모로부터 생명을 물려받고 또 자식에게 생명을 물려주고 떠남이다. 우주의 먼지로 살았고 우주의 먼지로 돌아간다. 삶의 순간순간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듯 떠남의 순간은 그 의미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건 순전히 우리 자신의 몫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마지막 과정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의사들은 떠남을 도와주기보다 삶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일에만 능숙하다. 의학적 노력이 큰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조차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비용이 얼마가 들더라도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는 것으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려 한다. 의사와 가족들이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는 가운데 정작 본인은 그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내지 못한다. 의학의 발달로 죽음의 과정은 과거처럼 짧지 않다. 조금씩 무너져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견뎌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