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함께 읽기
“우리는 왜 살아가고 죽는 걸까요?”
대학 2학년 초에 정말 궁금해서 한 선배에게 이렇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삶의 명령인 생명(生命)을 받았기 때문에 사는 것이고 그 생명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면 죽는 것이지. 죽음은 생명 이전의 단계로 돌아감일 뿐 다른 의미는 없어” 답변이 그럴듯했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거죠? “그건 네가 결정해야 지. 너의 삶이니까.” 선배의 대답은 이번에도 간단했다. 결국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뿐인 걸까?
그런데, 물음에 대한 대답보다 물음 자체가 더 궁금해진다. 우리는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일까? 주어진 삶을 그냥 살아가지 않고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 아웃사이더 >란 책을 쓴 콜린 윌슨은 어릴 때 부터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이것을 규명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철저히 연구했다. 그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을 그는 아웃사이더라 불렀다. 아웃사이더는 어느 순간 타인이나 자신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아 혼돈에 빠진다. 그리고 삶이 어떤 의미인지, 도대체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하지만 어떠한 답도 얻을 수 없고 삶을 부정하게 된다. 그들도 다른 이들처럼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고 싶고 강렬하게 "인싸"가 되고 싶다. 하지만, 이미 알아버린 후에는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달라져 버리고 삶을 즐겨야 할 순간에도 마음속에 또 다른 내가 나타나 방해한다.
나는 대학 입학 이전까지 특별한 개성이 없는 보통 모범생에 가까웠다. 마음속에 불만은 많지만 규칙을 지키는 것이 더 편하고 내 삶에 제약이 덜 가해진다고 믿었다. 적당히 상위권이라는 성적을 내놓으면 누구도 내 삶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에 와서 1년 정도 적응 기간을 거치고 생각의 틀이 깨지고 말았다. “너는 왜 살고 있나?”라는 물음이 나를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공부를 해도 술을 마셔도 심지어 데이트를 해도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림자처럼 뒤에 숨어 있다가 잠시 다른 생각을 멈추면 빚쟁이처럼 달려들어 내게 답을 내어 놓으라 했다.
한 동안 잊고 있던 물음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은 20년이 더 지난 후였다. 그동안 나는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군대를 다녀왔고,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라는 곳에 취업을 했고 운이 좋아 유학도 다녀올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면, 또는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알아내려면 계속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방향도 보이고 큰 물음에 대한 답을 마주치는 날이 올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다시 그 질문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예전보다 좋지 않았다. 회사와 집만 오가며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동만으로 가득한 내 삶은 바람직한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난 그저 주어진 일을 하고 있었고 힘들어도 버텨내어야 한다는 책임감만 가득했다. 의미 없이 책임감만 가득하면 노예의 삶이 아닌가. 그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삶의 의미를 찾기는커녕 내 삶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수렁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서점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은 가장 현실적인 얘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의사다. 그의 아버지가 심각한 병에 걸리고 치료를 받고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과정에서 겪는 일을 담담히 그린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당신은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고 싶나요?”라고 물어온다.
의학 기술은 인간에게 더 긴 삶의 시간을 주었다. 더불어, 그 기술에 더 의존하게 만들었고 살아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게 여기도록 했다. 기술의 발달 이전에 노인들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병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지막까지 그들의 역할을 다했던 이들이 많다. 경험과 지혜를 가진 인생의 선배로 대우받았고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 생을 마감했다.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큰 병에 걸리면 바로 병원에 입원해서 최선의 진료를 받는다. 하지만 최선의 기준은 항상 의사들이 정하고 환자나 가족은 그냥 따를 수밖에 없다. 나이가 더 들어 몸의 여러 곳에 문제가 생기면 요양원으로 가야 한다. 가족들은 각자의 생활에 바쁘고 누구도 노인을 돌보려 하지 않는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분명한 데, 과연 삶의 질도 더 나아진 것인가?.
<어린 왕자>는 앞의 책과 달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아주 작은 별에 살던 왕자가 여러 별을 여행하며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지구에 도착해서 비행사를 만나고 다시 돌아간다. 스무 살 어린 시절 이 책을 만났을 땐 “어린 왕자”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 들어 만나고 보니 주인공은 비행사인 “나”였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세상에 대한 질문이 많았지만 그냥 다른 어른들처럼 살아버린 “나”가, 어릴 적 자신을 소환하는 이야기였다.
이 짧은 얘기는 우리에게 세 가지 큰 질문을 던진다. 첫째,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장미의 가시는 무엇에 소용되는 거지?” 장미는 다른 많은 꽃보다 아름답지만 그 줄기에 가시를 갖고 있어 다른 존재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도 각자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하지만, 그건 그저 다름일 뿐 틀림은 아니다. 둘째, 소유에 대한 질문이다. “실업가 아저씨가 별을 소유하는 것은 별들에게 유익하지 않잖아?” 그들은 소유하기 위해 소유할 뿐이다. 그러나, 어린 왕자가 생각하는 소유는 그 대상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의미다. 셋째는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각각의 존재가 서로를 “길들임”으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되면 만남 자체가 의미 있는 활동이 되며 만나기 전부터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세 가지 질문보다 삶에 중요한 질문이 어디 있을까?
전혀 닮은 구석이 없고 현실과 비현실의 극단에 있는 두 책이 어느 날 내 마음속에서 연결되었다. 삶과 죽음. 당시 내 삶도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오랜 직장생활 동안 나름 성실하게 살아보려던 나의 노력은 내 삶을 의미 있게 채워주지 못했다. 오히려 방향이 어긋난 걸 알면서도 애씀과 버팀으로 가득했던 삶은 결국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버리고 말았다. 번-아웃된 이후로 휴직을 하며 말라버린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채우려 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나란 존재 중 회사에서 쓰임을 받는 부분만 쓰고 나머지는 버린 아이 대하듯 해왔기 때문이다. 쓰인 부분은 말라버리고 남은 부분은 잊혔다. 난 잊힌 나를 다시 찾아와야 했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의 감수성을 일깨우고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땀으로 몸을 적셨다. 휴직 후 다시 회사로 돌아왔지만 예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새로운 삶을 꿈꾸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 시대엔 하나의 직장은 물론, 하나의 직업도 계속되긴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보다 조금 일찍 두 번째 삶을 준비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감이 나를 떠나지 않았지만 우리 인간이 언제 그렇게 안정된 삶을 살았던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서는 슬픈 일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어린 왕자가 장미꽃과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길들임을 배우지 못할 때 아쉽고 슬프다. 한 노인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살아온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하고 병원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매달려 있을 때 슬프다. 슬프다는 건 감정인데, 생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슬픈 일을 막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미리 생각하고 막아야 한다. 삶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보면 행복도 슬픈 일도 큰 의미는 없다. 사는 건 의미도 재미도 없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 하지만, 아무리 깊은 고민을 하고 있어도 때가 되면 배가 고파진다. 모두가 아웃사이더가 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너무 재미없을 것이다. 다만, 누구에게나 물음은 필요하다. 어린 왕자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쉽게 얻을 수는 없다. 쉽게 얻은 건 쉽게 잊는다. 항상 물음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천천히 답을 찾아가며 실행하고, 살아가며 답을 수정해 나간다. 다른 어른들의 소리에 묻혀 자기만의 물음을 묻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삶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누가 어떤 식으로 삶을 규정하고 설명하더라도 그건 내 삶이 되기 어렵다. 타인과는 다른 DNA를 타고 난 나는 타인과는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그들이 찾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 발견될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