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서은국 교수의 책을 읽고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충격이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인간에 대한 기존의 모든 지식이 허물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졌다니. 이성적 생각으로 삶의 목표를 세우고 의미 있는 활동을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 행복감인 줄 알았건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먹을 때 행복하고, 친구들과 함께 얘기할 때 행복해지는 건 그게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한번 맛있는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행복감을 유지된다면 다시 고기를 찾을 이유가 없다. 배부름이 가라앉고 나면 다시 배고픔이 찾아오고 행복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사냥을 나선다. 인간은 그러한 행복감으로 인해 살아남도록 진화했다. 이런 진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동물임을 다시 깨닫게 한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 대 동물적 본능, 무엇이 진짜 모습일까? 우리는 이성의 역할을 상당히 과대평가하고 있다. 본능의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얼마나 움직이는지 과소평가하며 산다”
공작새 수컷은 멋지게 펼쳐지는 꼬리를 갖고 있다. 그 꼬리는 생존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공작새 꼬리의 눈 모양 무늬수가 많을수록 짝짓기 빈도가 더 높아진다고 한다. 임의로 무늬를 없애면 빈도는 낮아졌다. 수컷의 꼬리는 건강하고 더 좋은 유전자를 가졌다는 점을 암컷에게 어필하는 매력적인 도구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창의성이나 도덕성 같은 마음의 산물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멋진 꼬리는 없지만, 멋진 마음을 가진 이들이 짝짓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많은 사례들이 이 점을 증명한다.
남녀의 성향 차이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침팬지 집단에서는 소수의 수컷이 다수 암컷과의 짝짓기 기회를 독차지한다. 인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엄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전략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반면, 남자는 최고가 되지 않으면 짝짓기에서 낙오되기에 모 아니면 도 같은 극단적인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다. 남자들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가?
“뇌는 생존경쟁에서 직면하게 되는 과제들이 무엇이고, 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수백만 년간의 생존 기록서다.”
인간이 진화의 여정에서 침팬지와 갈라진 것은 대략 600만 년 전이고, 문명이 발생된 것은 약 6천 년 전이다. 인간이 1,000일을 살았다면 겨우 하루를 제외한 999일을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만 살았다는 얘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해서”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자연선택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한 개체 또는 유전자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따라서 현재 살아남아 있는 인류는 지구라는 환경 속에서 생존과 번식에 최적화된 존재다. 식욕, 성욕과 같은 가장 본능적인 부분뿐 아니라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성조차도 생존을 위해 진화하였다. 결국, 현대의 우리가 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과 정신조차 몸을 위해 발생하고 발달된 것이다.
고통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몸에 작은 상처만 생겨도 우리는 아픔을 느낀다. 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큰 상처가 되고 목숨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몸의 이상에서 오기도 하지만, 이별이나 외로움, 배신감도 우릴 고통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느끼는 뇌세포는 신체적 고통을 느끼는 뇌세포와 동일하다.
인간이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가 혼자가 되는 것은 생존에 치명적이다. 개인의 힘과 능력만으로 사냥하기는 어렵고 위험한 동물들의 위협을 견뎌내기 어렵다. 오늘날에도 조직 속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불합리한 조직의 규칙에도 따라가려 애쓴다. 결국 고통은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 행복감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어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문제는 우리가 느끼는 최고의 행복감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연구에 따르면 100억원 이상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도 1년 정도 지나면 행복감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해진다. 오히려 과거의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어지간한 일에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결국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복권을 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다. 확률이 낮더라도 당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행복감을 주기 때문일까?
커다란 목표를 달성해도 그 행복감이 오래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그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행복감보다 오히려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니 어쩌란 말인가?
예를 들어,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주위의 부러움을 한 번에 받게 된다. 가족들도 그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임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승진했던 순간의 행복감은 이미 사라졌다. 계속해서 주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임원이 된 후엔 더 큰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그로 인해 부하들과 예전처럼 친밀한 관계를 가져가기는 힘들다. 외로움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더구나 언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살아야 한다.
“사람은 가장 절대적인 행복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중략)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한국이나 일본은 경제 수준에 비해 행복도가 매우 낮다고 한다. 두 나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또는 집단의 안전을 위해 개인에게 과도한 요구를 한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철없고 이기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에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대단히 큰 스트레스가 된다.
또한, 행복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인데도 저 사람은 행복할 만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더 물질적 풍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 줄 조직이나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강하다. 더욱이, 돈에 집착할수록 정작 행복의 원천인 사람으로부터는 더 멀어져 다른 사람을 돕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도 줄어든다.
행복은 생존을 위해 우리 인간이 느끼게 된 감정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살아간다. 행복이 큰 목표가 되면서 커다란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생존의 곁에 있던 행복이 우리의 자아실현과 같은 높은 위치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하루 세끼를 먹는 것에서부터 느낄 수 있고 동료와의 사소한 대화로도 얻을 수 있다. 결국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만족감과 그런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더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