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기억 중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잊지 못한다는 건 충격이 컸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무엇인가가 깨어져버린다. 내 마음속의 평안함을 깨뜨리고 작은 머릿속에서 그려가던 새로운 세상을 깨뜨린다. 하지만, 깨어지지 않으면 깨어나지 못한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세상의 실체를 보아야 성장할 수 있다.
나무가 모진 겨울을 나며 그 몸속에 나이테를 그리듯 누구나 성장의 과정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나이테가 있다. 나이테는 고통의 흔적이지만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목재로 쓰이면 나이테는 멋진 무늬가 된다. 자연스러운 색과 독특한 결이 그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듯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그의 정체성을 이룬다. 깨어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간다.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이 방향을 가지면 작은 소망이 생기고 소망이 커지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누구도 아닌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삶의 신화를 써 간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하나의 길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좁은 길의 암시이며 시도이다. 그러나 이제껏 그 누구도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유년기에 삶의 전환점이 된 큰 사건을 겪는다. 그 보다 나이가 많은 크레머와 어울려 지내다가 자기가 하지도 않은 나쁜 일을 떠벌린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센 척하기 위해 자기가 저지른 일을 과장해 얘기하는 것처럼 어느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친 일을 지어내어 말해 버린다. 이 얘기를 들은 크레머는 과수원 주인에게 말하겠다고 협박하며 그에게 큰돈을 요구한다. 신앙심 깊은 부모님과 따뜻하고 부유한 집안 분위기에서 살아온 그는 이 일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심약하다. 크레머의 요구에 동전을 모아 둔 저금통을 깨지만 그것으론 크게 부족하다. 크레머는 돈을 더 받기 위해 싱클레어를 괴롭히고 그는 크레머와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당한 요구들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이때 그의 학교에 데미안이라는 상급생이 전학 온다. 데미안은 왠지 불안해 보이는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신학 수업 시간에 들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카인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는 신에게 분노하여 동생인 아벨을 죽였지만, 신은 그의 이마에 표적을 남겨 다른 사람들이 그를 헤치지 않도록 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데미안은 이 사건을 다른 관점으로 말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강한 정신력과 대담함이 눈빛에 서려 있어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두려움을 인정하기보다 그에게 신의 표적이 있다는 식으로 얘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경과는 다른 데미안의 해석에 싱클레어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그의 인식과 회의, 비판 의식에 영향을 준다.
크레머의 괴롭힘은 계속되었고, 어느 날 데미안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데미안은 절대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가 해석한 성경 이야기에서 결국 카인이 고귀한 사람이고 아벨은 겁쟁이다. 아벨이 되기보다는 카인이 되라는 말이다. 데미안은 크레머를 직접 만나 어떤 얘기를 하게 되고 그 이후로 크레머는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않는다.
이후 주인공은 크레머 사건으로 자신이 밝은 세계에 속해 있는 동시에 어두운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죄악과 불행을 아버지께 숨기는 과정에서 선하고 경건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밝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아벨과 같은 존재라고 믿어 왔지만 언제든 카인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데미안과의 대화를 통해 그런 생각이 모든 사람의 문제, 모든 생명의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원래 감정이 풍부하고 선한 아이였던 그는 점차 내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금지되고 어두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자신의 뱃속을 파먹는 새를 본다. 끔찍한 공포로 잠에서 깨어나 새의 모습을 그린다. 새는 커다란 알과 같은 어두운 지구에 박혀 있고 거기서 빠져나오려 한다. 꿈은 상징이다. 스스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오르길 갈망한다. 기존의 세상, 또래들과의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가 향하는 곳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이다.
아브락삭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신성을 지닌 존재다. 신이면서도 악마이고,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과 악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갑자기 누군가를 죽이고 싶거나 말도 안 되는 추악한 짓을 하고 싶어 진다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게 바로 아브락사스이다. 아브락사스를 받아들이면 자신의 꿈과 생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우리 마음속 영혼이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브락사스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이 가는 길은 힘겹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것만 현실이라 생각하지만, 내면에 있는 자기 세계야말로 진짜 현실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세계에 대해 말하지 못하지만, 일단 그게 현실임을 알게 되면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아직 미숙하고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빠진 싱클레어는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밖으로 끄집어내 세상과 관계 맺기를 갈망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괴리감은 카인의 표식이다. 또래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 보았기에, 자신의 내부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과 함께 지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의 눈빛은 이제 기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세상에 순종하던 아벨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부정하고 금지된 것을 해 낸 카인의 것이다.
무자비한 자연환경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 속에서는 아벨보다 카인의 태도가 유리하다. 하지만, 집단이 커지고 사회가 형성되면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하고 카인과 같은 부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집단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아벨을 칭찬하고 카인은 벌하려 한다. 겉으로는 아벨을 찬양하고 질서를 통해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 말하지만 그건 그저 말일뿐이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 신화일 뿐이다. 카인은 승자이자 지배자가 되고 아벨은 노예이자 피지배자가 된다.
우리들 각자의 내면세계에도 그런 싸움이 있다. 우리 모두는 과거 수백만 년간 생존을 위해 투쟁했던 인간의 DNA를 갖고 있다. 그 속에는 수 없이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낸 노하우가 들어 있다. 그 DNA가 자신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다가 외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 자신만의 세상이 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자신만의 DNA가 깨어나기 전 자신과 친숙하고 자신을 보호했던 세상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찾은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신감을 갖는 것, 어디로 가든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욱 정진해가는 것이다.”
소년은 사춘기를 겪으며 자신이 생각하던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부모나 다른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던 세상은 작은 사건으로 깨어진다. 그 사건은 외부 환경의 변화로 인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착하게 사는 것이 옳다고 배우지만 착하다는 것이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순간적으로 거짓말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안다. 이후로 그는 때때로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기만한다. 그리고 희열을 느낀다. 이렇게 자아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우리의 주인공처럼 감정이 풍부하고 섬세한 성향을 타고난 이들은 참 어렵고 힘들게 느낀다.
자신을 찾아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를 통해 오랫동안 고립되어 완전한 고독을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에만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된다. 그 공동체에는 다양한 부류의 구도자들이 있다. 각자가 꿈꾸는 은밀한 삶을 서로 존중한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인류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류와 다르다. 보존되고 보호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먼 미래, 아무도 그 모습을 모르는 미래일 뿐이다.
대학 입학시험이 가깝던 어느 밤, 졸음과 싸우던 나는 급기야 공부방에 난방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책장에 꽂혀있던 <데미안>을 만났고 그를 만난 이후의 나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전자공학, 기계공학 같은 당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려던 나는 물리학으로 선택을 바꿨다. 순수 학문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꺼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진짜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에게 밥벌이를 위한 공부는 큰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유년의 세상을 깨뜨리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새로운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아직 미미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던져진 운명, 주어진 의무 같은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아직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모습을 드러내는 자아의 모습에 흥분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에너지는 넘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찾기보다 기존 세상을 부수는 데 더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방황을 하고 한참이 지난 이후에야 정신을 차린다. 그것이 자아를 발견하고 꿈을 키워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