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나는 어떤 색으로 기억될까

3박 4일 여행 후기

by 최은
런던 여행 후기

런던행 티켓을 끊은 이유는 간단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 평생 꼭 보고 싶었던 것들이 전부 런던에 있더라.


〈레미제라블〉은 나에게 죽기 전에 볼 단 하나의 뮤지컬이다. 장발장의 구원과 자베르의 비극, 혁명의 열정이 울려 퍼지는 그 불멸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그때, 2025년이 런던 웨스트엔드 4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지금이다, 싶었다.


그리고 고흐와 모네.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고흐전을 보고 깨달았다. 나, 고흐 좋아하네. 모네는 말할 것도 없이, 내 최애 화가다. 국내에서는 단 한 번도 모네의 수련을 제대로 된 크기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 거대한 대작 앞에 서서, 그의 빛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런던은 가장 보고 싶었던 그림과 가장 보고 싶었던 뮤지컬이 동시에 있는 곳이었다. 인생 버킷리스트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1일차: 도시 야경

런던에 도착한 첫날,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였다. 비 내리는 템스 강변을 걸으며 이게 런던이구나를 바로 느꼈다. 오랜 세월을 견딘 석조 건축물들이 뿜어내는 묵직함과 영화 속에서 보던 화려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강물 위로 반사된 불빛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비추었다. 빅 벤의 따뜻한 황색 조명은 19세기를, 런던 아이의 차가운 LED는 21세기를. 한 도시 안에 여러 시간대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게 보였다. 첫날부터 런던은 내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겼고, 그 거대한 서사 속에 나 자신을 조용히 놓아보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2일차: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오페라의 유령

대영박물관


대영박물관의 거대한 아뜨리움에 들어서는 순간, 인류 문명이 쌓아올린 시간의 압도적인 무게가 느껴졌다. 그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 2400년 전 조각가가 돌에 생명을 불어넣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했다. 말의 근육, 옷자락의 주름 하나까지 어쩜 이렇게 조각했을까. 과연 유네스코의 엠블럼이 될 만하다.


그런데 동시에 불편한 질문이 떠올랐다. 이게 왜 여기에? 이 조각들은 영국 대사 엘긴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받아 가져왔다지만, 그리스는 당시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지금도 그리스는 신전의 조각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 교수가 지적했듯, 문화재는 태어난 땅과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들도 아크로폴리스의 햇살 아래에서 봤다면 훨씬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대영박물관은, 인류 문명의 위대함과 제국주의의 폭력성이 하나의 지붕 아래서 공존하는 기묘한 현장이었다.



내셔널 갤러리


그다음 방문한 내셔널 갤러리는 색채의 언어로 쌓아올린 환상의 궁전이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직접 보니, 한참을 서서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좋았다. 캔버스 위에 곂곂이 쌓인 유화가 너무 입체적이고 살아 있었다. 고흐의 작품은 그의 삶의 고통을 알고 볼 때 비로소 더 깊이 다가오는 것처럼, <해바라기>도 마찬가지다.


고흐의 꿈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동료 화가들과 그림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 예술가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준 건 단 한 사람, 고갱뿐이었다. 고흐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고갱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가득 채우려 했다. 그렇게 일곱 점의 해바라기를 그렸다. 고갱이 오면 분명 좋아할 거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고갱은 두 달 만에 떠났다. 결국 귀 자르기 사건이 발생했고, 고흐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의 해바라기는, 그렇게 쓸쓸한 외로움의 증거로 남았다.


캔버스 위 두꺼운 유화의 터치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가 느꼈을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전해진다. 살아생전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던 그가, 친구를 위해 정성껏 그렸던 해바라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이 됐다.


그리고 모네. 나는 모네의 그림을 보면 삶이 치유되는 감정을 느낀다. 그의 붓질은 단순히 대상을 재현한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한 지극한 애정을 색으로 옮긴 것 같다.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빛깔이 나올 리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모네는 빛이 눈을 앗아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내장으류 시력을 잃어가는 생의 끝자락까지 빛의 떨림을 집요하게 화폭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 세상의 기억이 되었다. 그가 결국 세상을 떠났을 때, 검은 관포를 본 오랜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는 "검정은 모네를 위한 색이 아니오!"라며 검은 천을 걷어내고 관 위에 화려한 색의 커튼을 덮었다.


이 일화를 처음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모네의 삶은 끝까지 빛을 그리려는 사람의 숭고한 기록이었구나. 과연 나는 세상에 어떤 색을 칠하고 있을까. 나는 어떤 색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미술관을 나서면 작품뿐 아니라, 그림을 그렸던 사람의 삶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인정받지 못한 채 외롭게 붓을 들었을 고흐,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수련을 그린 모네. 그들의 고독과 꿈이 머무는 그곳에서, 나 역시 내 삶의 색을 다시 묻게 된다.



오페라의 유령


런던에서의 첫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고풍스러운 극장 외관에서부터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1열에 앉아 배우들의 숨결을 느끼며, 표정과 손끝의 떨림, 호흡 하나까지 따라가다 보니 팬텀과 크리스틴의 비극적 갈망이 그대로 전해졌다. 배우가 눈물 흘릴 때 그 방울의 떨림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1막 마지막 장면에서, 팬텀이 무대 위에서 절규하는 순간, 거대한 샹들리에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낙하했다. 전율 속에 숨이 멎는 듯했다.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 팬텀 역 Dean Chisnall과 크리스틴 Lily Kerhoas에게 감사하다. 두 주연 배우 모두 발끝부터 머리끝, 눈동자와 숨소리까지 팬텀이고, 크리스틴이었다.


크리스틴이 팬텀의 밤의 노래에 이끌려 지하세계로 내려갔듯, 나도 런던의 예술과 음악이 들려주는 찬란한 선율에 매혹되어 황홀 속으로 빠져든 둘째 날이었다.


(나에게 〈오페라의 유령〉은 칼 융의 ‘그림자’ 심리학을 극적으로 구현한 무대 예술이다.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더 자세한 리뷰는 별도의 글을 통해 정리해보려고 한다)



3일차: 시내 구경, 〈마틸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런던 중심부를 걷는 건 역사책 위를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웨스트민스터 궁전과 빅 벤 앞에서, 영국의 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21세기에 귀족 작위를 세습받아서 국회의원 하는 나라라니. 이 나라는 헌법도 없나? 싶은데 사실이다. 마그나카르타 이후 명문화된 헌법 없이 관습과 전통으로만 굴러가는 정치 시스템.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제도 중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모순적인 체제.



이런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세인트 제임스 파크. 살면서 이렇게 신기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새들과 다람쥐들이 내 곁에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심 한가운데서 느껴본 이 평화로운 생명감이 참 따뜻했다.



그리고 버킹엄 궁전. 화창한 날씨 속에서 인파와 함께 본 근위병 교대식 행진은 그야말로 런던의 미학이었다. 각이 잡힌 동작 하나하나와 힘찬 음악 소리, 시꺼먼 곰털 모자와 빨간 근위복의 색감 대비까지 왜 런던의 상징인지 이유를 알겠더라.



마틸다 더 뮤지컬


오후에 본 〈마틸다 더 뮤지컬〉은 유쾌한 동화 속에 유머와 교훈을 녹여낸 수작이었다. 로알드 달의 원작처럼, 책으로 지혜를 얻은 소녀 마틸다가 부조리한 어른의 세계(미스 트런치불)에 맞서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이 극은 모든 아이들이 꼭 봐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모두가 일어나 손이 터져라 박수를 치는 순간까지. 내 인생 최고의 관극이었다.


특히 트런치불 역의 배우 Jon Robyns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표정, 호흡, 몸짓 하나하나가 완벽했다. 초콜릿 케이크를 억지로 먹이고, 아이들을 던져 날리는 장면에서는 깔깔거리면서도 동시에 오싹해서 소름이 돋았다. 웨스트엔드 탑급 주연 배우의 실력에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나는 두 번 글썽거렸다. 첫 번째는 ‘When I Grow Up’ 넘버였다. 무대 위 아이들이 그네를 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면 높은 나뭇가지에 닿을 수 있을 거야… 누굴 도와줄 만큼 강해질 거야… 괴물과 싸울 수 있을 만큼 용감해질 거야…” 그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희망하는 선한 소망이 참으로 귀하다. 뒤이어 어른들이 등장해 더 높이 그네를 타며 같은 노래가사를 반복한다. 아이들의 순수한 기대와 어른의 현실 사이의 간극이, 그네의 높이만큼이나 멀게 느껴져서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두 번째로 울컥한 건 ‘Revolting Children’이었다. 트런치불 교장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마침내 반격을 시작하는 장면. 처음엔 작고 떨리던 목소리가 점점 합창으로 번지며, 알파벳 블록을 무기 삼아 아이들은 자신들의 철자를 외치고 책을 던지며 반항을 일으킨다. 관객석의 아이들도 박수를 치며 호응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는 작은 혁명가들이구나. 이토록 아름다운 뮤지컬을 이렇게 무해한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세상이란 게,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에 뭉클했다.


언젠가 나도 부모가 된다면, 꼭 다시 런던에 와서 아이와 함께 〈마틸다 더 뮤지컬〉을 보리라. 그때까지 세상이 아이들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길. 그리고 이들의 노래가 멈추지 않기를.



레미제라블


드디어 나를 런던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뮤지컬, 〈레미제라블〉. 이 공연을 내가 1열 중앙에서 보고 왔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걸까 싶다. 웨스트엔드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내가 이걸 보러 왜 런던까지 왔는지 완전히 납득시켜줬다. 40주년 기념 공연에 걸맞게 캐릭터의 원형 그 자체, 그 이상을 보여준 주연 배우들. 장발장 Killian Donnelly, 자베르 Bradley Jaden, 팡틴 Katie Hall, 마리우스 Jac Yarrow, 에포닌 Shan AKo, 앙졸라 Jodan Shaw, 코제트 Beatrice Penny-Toure, 테나르디에 부부 Adam Gillen, Marina prior. 모두 Bravo!


그리고 〈레미제라블〉의 불멸의 힘은 역시 혁명의 노래에 있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시작하는데, 내 몸속 깊은 곳에서 자유와 평등, 정의를 향한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는 걸 느꼈다. 내 선조들은 아마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것 같다. 내 DNA에 혁명이 새겨져 있음이 틀림없다. 특히 'One Day more'에서 울려퍼지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합창은 죽기 전에 한번은 꼭 들어봐야 한다.



4일차: 세인트 폴 대성당, 타워 브릿지, 버로우 마켓, 테이트 모던


세인트 폴 대성당


여행의 마지막 날. 런던 동부로 향했다. 이제 막 런던 사람이 된 것 같은데, 떠나야 한다니 마음이 아렸다.


대단했던 세인트 폴 대성당. 거대한 돔이 하늘을 떠받치는 듯했다. 크리스토퍼 렌 경이 남긴 바로크 건축의 정수. 안으로 들어서자, 돔 천장에 부서지는 빛과 파이프 오르간의 낮은 울림이 맞물려 경건한 장엄함을 만들어냈다. 웅장한데 평온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세인트 폴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황금빛 모자이크와 정교한 조각들이 시선을 붙잡았고, 오르간의 음이 천장을 타고 흐르며 공간을 감쌌다. 돔 한가운데에 서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극점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거대한 석조 기둥 너머로 비가 쏟아졌다. 오래된 신앙의 숨결이 비바람에 섞여 천천히 흩어졌다.



타워 브릿지


타워 브릿지에 가는데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런던 사람들은 비를 맞는다’는 낭만적인 편견과 달리 모두 우산을 쓰고 있더라. 현실은 현지인의 것이지만, 낭만은 관광객의 것. 비바람 속에서 다리를 건너며 런던의 마지막날을 음미했다.



버로우 마켓


곧바로 도착한 버로우 마켓은 비바람에 지친 몸을 녹이는 활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구운 치즈 냄새, 갓 내린 커피 향이 한데 섞여 따뜻하게 일렁였다. 나는 몬머스 커피로 달려가 따뜻한 플랫 화이트 한 잔을 주문했다. 한 모금 마시자, 둥글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감싸며 런던의 추위를 단번에 녹여냈다. 너무 맛있어서 원두를 두 봉지 사 들고 나왔다.



테이트 모던


여행의 종착지, 현대 미술관 테이트 모던. 버려진 화력 발전소를 재생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과거의 유산과 현대의 혁신’이 만나는 현장이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지적 자극을 받았다. 이곳을 놓쳤다면 정말 아쉬웠을 것 같다.


테이트 모던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한 작품은 앙리 마티스의 〈The Snail〉이었다. 화면은 주황, 초록, 파랑, 보라, 노랑 같은 원색들이 소용돌이치듯 배열돼 있었다. 달팽이의 껍질을 연상시키는 나선 구조 안에서 색들은 서로 밀고 당기며, 긴장과 조화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마티스가 평생 탐구했던 조화 속의 생명력이 바로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다양하고 불완전한 것들이 모여 조화로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세상의 방식을 느꼈다.


이어서 마크 로스코의 방으로 들어가, <Black on Maroon> 앞에 섰다. 거대한 색면은 숨 쉬듯 일렁이고, 진한 붉은빛의 깊이는 곧 검붉은 여운으로 스며든다. 로스코의 화면은 단순한 색의 조합이 아니라, 감정의 장이다. 가까이 다가서면 색이 나를 삼킬듯 압도하고, 한걸음 물러서면 그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간다. 불안과 숭고, 절망과 평온이 동시에 피어오르는 작품.


마지막으로 이우환의 〈From Line〉 앞에서 또 멈춰섰다. 반복된 선들의 리듬은 단순하지만, 그 안엔 반복과 차이가 숨어 있다. 내게 다가온 건 선과 선 사이의 여백이다. 여백은 단순한 빈칸이 아니라, 생각이 머무르고 존재가 숨 쉬는 자리다. 나도 그 앞에서 서서 나에게 주어진 여백을 천천히 호흡했다.


테이트 모던에서 마티스의 색채적 생명력, 로스코의 감정적 심연, 이우환의 여백적 사유를 차례로 마주하니, 서로 다른 삶이 서로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각기 다른 색으로 그려진 침묵이 한데 어우러져, 런던에서 내가 붙들었던 사유의 원을 천천히 닫아주었다.



여행 이후


사실 런던에 오기 전에 걱정을 했다. 평생 보고 싶던 모네와 고흐를 만나고, 레 미제라블과 오페라의 유령을 1열에서 본다면, 그다음엔 더 바랄 게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완전히 반대였다.


인류 문명이 빚어낸 아름다움들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니, 오히려 더 욕심이 생겼다. 이런 감동을 더 경험하고 싶다. 세상은 넓고, 아름다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다짐했다. 언젠가 꼭 프랑스의 오랑주리와 오르세 미술관에 가리라. 모네의 수련 대작을 오랑주리의 타원형 방에서, 반드시 마주하리라.


런던을 떠나며 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노예제로 가장 큰 이익을 본 나라도 영국이고, 세계 최초로 노예제 폐지법을 통과시킨 나라도 영국이다. 여전히 왕이 존재하지만,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운 나라도 영국이다. 대영박물관에 세계의 문화재를 약탈해온 나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 세계인에게 무료로 공개한 나라이기도 하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나라. 그러나 생각해보면, 영국이 그렇게 모순적인 건 결국 인간이 그렇기 때문 아닐까. 아름다움과 폭력성, 고귀함과 비열함을 동시에 품은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3박 4일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에 올라, 지금은 다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나는 교대근무를 서는 중인데, 최근에 인원이 부족해 쉬는 날이 거의 없이 한 달째다. 낮과 밤이 뒤바뀌는 것도 모자라 휴식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그런데도 가을 공기와 하늘이 너무 좋아서, 이상하리만큼 행복하다. 이 좋은 날씨에 안 뛸 수가 없어서,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내년에는 풀코스에 도전해야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내 작품 속에 내 목숨을 걸었고, 그 때문에 내 이성은 반쯤 망가졌다. 하지만 괜찮다….” 고흐는 예술가로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의 숙명으로 여겼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목숨을 걸었고, 모네는 아름다운 빛에 두 눈을 바쳤다. 장발장은 인간 구원을 위해 삶을 내던졌고, 마틸다는 부조리한 세계에 용기내어 맞섰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꿈에, 누군가는 사랑에, 또 누군가는 시험에. 그 치열함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 아름다운 것들과 마주하며, 하루하루를 나의 색으로 채워가야지. 그렇게 채워나간 시간들이 모여, 언젠가 우리는 각자의 ‘해바라기’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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