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뷰 시리즈 3 ㅣ 오페라의 유령

그림자와 함께 춤을

by 최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런던 웨스트엔드 His Majesty’s Theatre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뮤지컬이다. 가스통 르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했다. 19세기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지하에 사는 음악의 천재 팬텀과 젊은 소프라노 크리스틴, 그리고 그녀의 연인 라울 사이의 비극적 삼각관계를 그린다.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추락하던 순간, 내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쳤다. 천 개의 촛불이 꺼지고 무대는 어둠 속에 잠겼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것이 있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단순한 낭만 비극이 아니다.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그림자(Shadow)’, 즉 자기 안에 억압된 어둡고 미완의 가능성을 어떻게 마주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 과정이 음악과 무대 장치, 배우의 몸짓에 실려 한 곡의 호흡처럼 이어진다.


팬텀은 가면을 쓴 채 등장한다. 무대 뒤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처음엔 웅얼거림처럼 작게 시작해, 점차 극장 전체를 채운다. 객석이 숨을 죽인다. 그의 거처는 무대 아래,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지하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그 공간은 심리학적 무의식이자, 사회에서 밀려난 상처와 모멸의 기억이 가라앉은 내면의 층위다. 그는 육체보다 목소리로 존재하며, 어둠 속에서 경계를 넘어 크리스틴과 관객을 동시에 파고든다.


팬텀은 목소리만으로 존재를 각인시킨다. 배우의 높은 테너는 위협과 애원을 동시에 품고 있고, 가면 너머 눈빛은 분노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그가 무대 위에서 숨쉬는 소리는 거칠면서도 가냘프게 울렸고, 공기는 애처로워졌다.


팬텀은 사회가 버린 얼굴을 지닌 자이며, 사랑받지 못했기에 사랑을 꿈꾼다. 그의 손끝에서 피아노 건반을 따라 흐르는 선율은, 고통을 음악으로 변환시키는 연금술 같았다. 결핍과 어둠에서 선율을 길어 올리는 그의 음악은, 예술이 어떻게 억압된 그림자의 바닥에서 태어나는지 보여준다. 팬텀의 음악은 고통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 고통을 초월하려는 인간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 팬텀은 과연 누구인가.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죽은 아버지는 그녀에게 “음악의 천사가 찾아올 것”이라는 약속을 남겼다.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크리스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신화가 되었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크리스틴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원했던 완벽한 노래, 아버지가 약속했던 천사의 이미지, 그것을 향해 자신을 맞추어가는 과정에서 크리스틴 자신의 진짜 욕망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팬텀은 크리스틴에게 처음 나타날 때 스스로를 ‘음악의 천사’라 칭한다. 크리스틴은 그를 아버지가 보낸 존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천사는 사실 그림자였다. 크리스틴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타인의 기대,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그리고 그 속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팬텀이라는 형상으로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The Phantom of the Opera>에서 반복되는 “The Phantom of the Opera is there, inside my mind.” 이 노래가 흐를 때, 크리스틴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려움과 이끌림이 동시에 담긴 표정. ‘내 마음속에 있다’는 표현은 팬텀이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크리스틴 내면의 충동, 억압된 자아의 일부임을 드러낸다.


팬텀이 그녀를 ‘천사’라 부르는 것은 숭배가 아니라 대상화다. 천사는 완벽하지만 인간이 아니며, 욕망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팬텀이 원하는 완벽한 구현체로서 크리스틴은 욕망의 대상화된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단순히 수동적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팬텀의 세계에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거부한다. 그 안에서 규범과 충동, 이성적 사랑과 원초적 욕망, 예술적 열정과 사회적 안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무대 위에서 크리스틴이 내는 목소리의 결은 계속 변화한다. 팬텀 앞에서는 떨리고, 라울 앞에서는 안정되고, 혼자 남았을 때는 갈라진다. 그녀의 노래는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내면의 균열을 소리로 번역하는 과정이었다.


팬텀이 거울을 통해 크리스틴을 데려가던 순간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거울이 천천히 회전하며 열릴 때, 뒤편의 지하 세계가 안개와 촛불로 드러났다. 조명이 물결치듯 번지는 지하 호수 위로 작은 배가 떠간다. 이 장면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정신의 이동이다. 거울은 자기인식의 상징이며 동시에 무의식의 입구다. 거울 너머는 현실과 이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간, 곧 욕망의 밤이다.


<The Music of the Night>, “Turn your face away from the garish light of day.” 팬텀의 노래는 낮의 윤리와 규범, 사회적 시선과 판단을 등지고 욕망의 어둠 속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이다. 선율은 꿈결처럼 이어지고, 낮게 깔린 오케스트라 반주는 심연의 감각을 만든다. 팬텀이 말하는 ‘밤의 음악’은 감각과 충동, 금기와 탐닉이 허용되는 경계적 세계다. 이곳에서 예술은 탈규범적 창조의 언어가 되고, 인간은 자신의 억압된 충동과 마주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은 목소리가 울리지만 자율성은 지워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팬텀의 음악은 크리스틴에게 목소리를 선물했지만, 그녀의 주체적 목소리를 잠식하기도 한다. 예술은 억압을 해방시키지만, 또 다른 억압의 형태가 된다. 여기서 그림자의 욕망이 강력한 창조의 동력이자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양면적 힘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팬텀의 〈The Music of the Night〉이 밤의 유혹이라면, 라울의 〈All I Ask of You〉는 낮의 약속이다. 두 곡이 대비되는 순간, 음악만으로도 두 남자의 본질이 드러난다. “Let me be your shelter, let me be your light.” 라울은 크리스틴을 지하로 끌어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빛이 될 테니, 삶의 표면 위에서 함께 견디자고 말한다. 라울은 두 팔을 벌려 크리스틴을 감싸고, 그의 바리톤은 팬텀의 테너와 달리 따뜻한 확신에 차 있다.


크리스틴은 밤의 유혹과 낮의 약속을 모두 통과한 뒤에야 자기 목소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녀의 선택, 팬텀의 세계를 떠나 라울과 함께하는 길은 사회적 질서를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욕망을 주체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여정이다. 이 선택에는 자아 확립의 서사가 있다.


환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샹들리에가 추락하고, 〈Point of No Return〉에서 사랑은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이 장면에서 팬텀은 크리스틴과 함께 노래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부르는 듀엣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관객은 안다. 크리스틴도 안다. 저 가면 너머가 팬텀이라는 것을. 그녀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가면을 벗기는 찰나, 심리적으로 유지되던 환상이 무너진다.


샹들리에가 추락하는 순간은 예술적 구조물의 해체이자 허구의 종말, 동시에 진실의 시작이다. 불꽃이 튀고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팬텀은 자신이 만든 환상의 세계가 끝나감을 직감한다.


가면이 벗겨지는 그 순간, 팬텀의 얼굴에서 모든 방어가 사라졌다. 그가 몸을 돌리며 움츠러드는 모습은 어떤 대사보다 강렬했다. 객석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장면은 전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환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마지막에 팬텀이 남기는 한마디. “Go now, don’t let them find you.” 소유하려던 사랑을 놓아주는 선택. 괴물이라 불리던 그는 그 순간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사랑을 건넨다.


이 짧은 말 속에는 모든 변곡이 담겨 있다. 붙잡는 사랑에서 놓아주는 사랑으로, 투사된 욕망에서 자각된 존재로, 팬텀은 바뀐다. 이 순간, 그림자는 처음으로 햇빛 아래 드러난다. 그림자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소유’에서 ‘존재’로 나아갈 때 가능하다.


크리스틴은 팬텀과 마주함으로써, 즉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함으로써 온전한 존재가 된다. 그녀가 팬텀의 세계에서 벗어나 라울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욕망도, 팬텀의 욕망도 아닌, 자기 자신의 욕망을 처음으로 욕망하는 순간이다. 타자의 욕망에서 자기 욕망으로의 전환.


그림자를 마주하기 전에는 빛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크리스틴이 라울을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팬텀이라는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고 난 뒤였다. 진정한 성숙은 어둠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과 함께 춤을 추는 일이다. 그림자는 억누르면 비극이 되고, 함께 노래하면 예술이 된다.


『오페라의 유령』이 오래 사랑받는 까닭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선율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자기 안의 지하를 내려다보게 한다. 누구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하나쯤 품고 산다. 그곳에서 어떤 날은 괴물이 태어나고, 또 어떤 날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피어난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 불이 켜졌을 때,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막이 내려도 유령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유령의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 안의 다른 얼굴이 부르는 노래였다. 우리 안의 그림자가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끝내 들어주는 자아의 응답.


그래서 이 음악은 계속된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밤에서 낮으로, 그리고 각자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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