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뷰 시리즈 4 ㅣ 레미제라블

사랑은 세상을 다시 쓰는일

by 최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198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이후, 40년 동안 전 세계 무대에서 사랑받아온 작품이다. 1832년 파리의 6월 봉기를 배경으로,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복역한 장 발장의 구원과 혁명,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나 아렌트는 사랑을 “세계를 파괴하는 힘”이라 말했다. 그날 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레미제라블』은 그 역설을 무대 위에 구현한다. 사랑은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힘이다.


이 뮤지컬이 단순한 감동의 공연을 넘어,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증언하는 예술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랑이 개인의 윤리를 넘어 공동체의 윤리를 바꾸고, 한 사람의 눈물이 모두의 미래를 여는 정치적 사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I Dreamed a Dream〉에서 팡틴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떨리다가 점점 부서져 간다. 그녀는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목소리의 파열로 보여준다. 팡틴의 절망은 개인적 고통으로만 머물지 않고, 사회가 외면한 이들이 어떻게 꿈을 포기해야 했는지를 말한다. 노래가 끝날 때 관객이 흘리는 눈물은, 우리가 여전히 갚지 못한 공동체적 부채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On My Own〉에서 에포닌은 ‘짝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닿지 않는 감정을 토해낸다. 빗속을 걸으며 부르는 그 노래는, 사랑받지 못한 자의 고독을 소리로 번역한다. 사랑받지 못한 자는 흔히 잊히지만, 뮤지컬은 그 소외된 감정에 마이크를 쥐여준다.


“Only on my own”이라 부르짖는 그 목소리는 우리 각자의 내밀한 기억을 흔들어, 누군가를 홀로 사랑했던 순간을 소환한다. “He’s never even knew I was dying.” 마리우스는 에포닌의 죽음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원망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감정이 가장 고독하고도 아름답게 승화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One Day More>은 모든 개인적 서사가 하나의 ‘내일’을 향해 모이는 집단적 숭고의 절정이다. 장 발장이 “One day more”을 외칠 때, 자베르가 같은 가사를 다른 음역으로 응수한다. 한 사람은 구원을, 다른 사람은 응징을. 같은 말, 다른 의미.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사랑을 노래하는 동안, 에포닌은 홀로 외로움을 삭인다. 혁명가들의 합창이 점점 커지고, 무대 위 모든 목소리가 하나로 겹쳐진다.


넘버가 흐르며 인물들의 욕망, 고통, 희망, 분노, 사랑이 교차하며 격렬히 쌓인다. 각 멜로디는 인물의 고유한 서사이고, 그 이야기들이 동시에 울릴 때 우리는 무대 위에 직조되는 거대한 인간 서사시를 목격하게 된다. 음악적으로 오페라의 푸가 구조를 응용하여, 뮤지컬 특유의 직접성을 극대화한다.


모든 목소리가 합쳐질 때 혁명의 울림이 내 몸을 뒤덮는다. 이 넘버가 위대한 이유는, 사랑과 혁명이 분리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일을 부르짖지만 그것은 정의의 내일이자,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내일, 또 다른 이에게는 생존의 내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 같은 내일이다.


사랑과 삶은 결코 비정치적일 수 없으며, 정치란 결국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무대 위 모든 인물이 각자의 내일을 향해 달려갈 때, 나도 그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심장을 내민다.


그 서사의 정점에 놓인 곡이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다. 이 넘버는 침묵을 강요받은 이들이 세상에 던지는 첫 질문이자 선언이다. 인간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그 이상을 노래로 부른다. 소수의 선율이 모이고 커지며, 마침내 하나의 집단적 화음으로 고조된다. 개인의 분노와 공동체의 신념이 하나로 뭉칠 때, 음악은 인간의 결의를 형상화한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 퍼질 때, 내 몸속 깊은 곳에서 자유와 평등, 정의를 향한 본능적인 갈망이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인간의 존엄을 향한 염원이라는 공통분모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넘버는 언제나 지금-여기에 유효한 선언으로 남는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 단지 1832년 6월 봉기로 머물지 않고, 오늘의 무대로 반복해 돌아오는 살아 있는 정치적 텍스트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래하는 자가 남아있는 한, 희망은 꺼지지 않는다.


〈Bring Him Home〉은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기도다. 장 발장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부르는 이 넘버는, 신이 아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God on high, hear my prayer.” 기도는 처음에는 개인적 소망에서 시작한다. ‘내 딸을 위해 그를 살려 달라.’ 그러나 죽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지나면서, 그 간절함은 ‘그가 그 자체로 살아야 할 존재이기에, 그를 살게 해달라’는 보편적 요청으로 확장된다.


반복되는 “Bring him home”은 더 간절해지면서도 점점 더 평온해진다. 마지막 음표에서는 완전히 초월한 듯한 표정과 목소리. 자기 욕망에서 멀어질수록 깊은 평화에 닿는다는 역설적 진리가 배우를 통해 구현되는 장면이다.


장 발장은 구원받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다. 그 선택은 수많은 생명을 살려냈다.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지켜낸 것은 신도, 총칼도 아닌, 떨리는 한 인간의 손이었다. 그의 삶은 소유에서 존재로, 애착에서 책임으로 옮아가는 사랑의 여정이며, 윤리적 실천의 가장 명징한 서사다.


그러나 누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베르는 이 작품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법과 질서의 언어를 믿었다. 그의 자세는 언제나 꼿꼿하며,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그러나 장 발장이 보여준 연민과 자비는 그 질서를 무너뜨린다.


〈Stars〉에서 그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을 노래한다. 법은 그에게 어둠 속의 별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 그런데 그 별도 언젠가 떨어진다. 그는 양심이 법을 이기는 순간을 마주하고, 자신이 믿어온 신념이 흔들리게 된다. 만약 이성과 법이 이 ’불쌍한 사람들(레미제라블)‘의 목소리를 진정으로 담아내고 있었다면, 자베르의 결말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법과 이성이 소수만을 위한 세계에 봉사할 때, 그 수호자는 결국 자신을 무너뜨린다.


바로 그 지점에서 혁명의 본질은 더욱 선명해진다. 혁명은 억압의 전복일 뿐 아니라, 언어의 전복이다. 사랑의 언어가 법의 언어를 대체하는 순간, 정의는 다시 쓰인다.


혁명은 총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진짜 혁명은 나를 바꾸는 일이다. 사랑이 사적 욕망을 넘어 타인의 고통 앞에 멈춰설 때, 세상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확장은 언제나 실패에서 시작된다. 사랑이 좌절되고, 죽음과 상실이 지나간 뒤에야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레미제라블』은 실패한 사랑들의 기록이자, 그 실패들이 남긴 증언이다.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 혁명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레미제라블』이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할 뮤지컬인 이유다.


마지막 장면. 죽은 자들이 다시 무대 위에 선다. 완성되지 못한 혁명,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그들은 돌아온다.피날레는 관객의 존재를 전제한다. 죽은 자들이 노래하고, 산 자들이 그 노래를 듣는다. 이 순간은 뮤지컬의 마법이다.


공연을 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이 꿈꾸던 ‘내일’을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 달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청이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래, 살아보자.

그들이 꿈꾸던 내일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순간을.


오페라의 유령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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