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해도 괜찮아
가끔, 누군가의 표정이 평소보다 어둡기만 해도 마음이 흔들린다.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는 이유만으로 불안해진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아니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는 어릴 때부터 감각이 유난히 예민한 편이었다. 모자나 장갑은 물론, 청바지도 까끌하다고 못 입었다. 핸드크림이나 선크림의 질감조차 답답해서 피했다. 물론 지금은 수분 손실과 자외선에 더 민감해져서 열심히 바르지만.
마피아 게임을 해도 거짓말하는 사람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눈에 잘 보인다. 울기도 참 잘 운다. 음악을 듣다 울고, 맛있는 걸 먹고 울고, 모네의 그림을 보고도 울었다. 민법 수업을 듣다가 울었던 적도 여러 번 있다. 슬픈 영화나 소설은 말할 것도 없다. 뮤지컬에 빠진 것도 그 예민한 감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민감함을 설명해줄 개념을 찾았다. 바로 HSP(Highly Sensitive Person), 고도 민감성 성향이다. 이 단어를 알게 된 순간, ‘아 이거 나다’ 싶었다. 어쩌면 MBTI보다 훨씬 정확하게 나를 설명해주는 단어 같다. 그 후 곧바로 관련 책을 찾아 읽었고, 그중 하나가 최재훈의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이다.
엘레인 아론이 제시한 HSP 개념은 말 그대로 ‘감각의 민감함’을 설명한다. 그 원인은 전두피질의 활성도가 평균보다 높아 외부 자극을 더 세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초감각자’들의 수신기는 세상의 모든 주파수를 고감도로 포착하여, 필요 이상의 인지적 부하와 정서적 소진을 겪게 된다.
책에 소개된 HSP를 알아보는 23가지 테스트 항목이 있다. 천천히 읽으며 자신에게 해당하는지를 체크해보자.
1. 나는 주위의 미묘한 변화를 잘 인식한다.
2. 나는 다른 사람의 기분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3. 나는 통증에 민감하다.
4. 나는 바쁘게 보낸 날엔 어두운 방이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숨고 싶다.
5. 나는 카페인에 민감하다.
6. 나는 밝은 빛, 강한 냄새, 사이렌 소리에 쉽게 피곤해진다.
7. 나는 풍부하고 복잡한 내면 세계를 지녔다.
8. 나는 큰 소리에 불편함을 느낀다.
9. 나는 미술이나 음악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10. 나는 양심적이다.
11. 나는 깜짝깜짝 잘 놀란다.
1.2 나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하면 당황한다.
13. 나는 사람들이 불편해할 때 어떻게 해야 편안해질지 안다.
14. 나는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요구받으면 짜증이 난다.
15. 나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16. 나는 폭력적인 장면을 피한다.
17. 나는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긴장한다.
18. 나는 배가 고프면 감정이 크게 요동친다.
19. 나는 생활의 작은 변화에도 쉽게 흔들린다.
20. 나는 섬세한 향기, 맛, 예술작품을 깊이 즐긴다.
21. 나는 소란스러운 상황을 피하려고 생활을 정돈한다.
22. 나는 경쟁하거나 누가 지켜보면 평소보다 실수를 많이 한다.
23. 나는 어릴 적,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나를 ‘민감하다’고 여겼다.
이 중 13개 이상 해당되면 HSP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나는 20개였다. 이 책의 저자는 무려 23개 전부에 해당된다고 한다. 만약 스스로 HSP인 것 같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흔히 ‘예민한 사람’이라 하면 신경질적이거나 까다로운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심리학에서 말하는 예민함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늘 상대에게 맞춰주고, 갈등을 피하려 애쓰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언제나 타인의 감정과 분위기를 살피며 모두를 편하게 해주려 애쓰는 사람들이 바로 HSP, ‘초감각자’다.
HSP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초감각(super sense). 공기, 빛, 숨소리 같은 미세한 자극까지 포착한다. 공간의 온도가 달라진 것도, 조명의 색이 살짝 변한 것도 느낀다. 초감정(super feeling). 타인의 감정이 파동처럼 내 몸에 울린다. 뉴스를 보면서도 그 감정을 자신에게 새긴다. 심미안(aesthetic sensitivity) 예술과 자연의 결을 더 깊고 섬세하게 느낀다.
이런 특성은 환경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우호적인 환경에서는 감정의 깊이로 사람을 위로하지만, 부정적인 환경에서는 남의 스트레스까지 짊어지고 번아웃이 올 수 있다.
초감각자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에, 실제 마음 속과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 사이의 간극이 크다. 속 안에선 파도가 치는데 말로는 “괜찮다”고 반복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조차 서툴러서, 오히려 무감정해 보일 때도 있다. 평소에는 순둥순둥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극도의 감정을 표출한다고 느낀다면, 그건 그간 인내해온 HSP의 임계점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때, 그 틈새에서 홀로 외롭기도 하다. 그 간극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초감각자 인생의 과제다. 감각적 기질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지만, 세심한 자신과 달리 무감각한 인간 군상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경우가 많다.
죄책감에도 민감하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갈등이 발생했을 때 ‘내가 잘못한 건 없는지’ 자책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점이 아니라, 윤리와 감수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처럼, HSP에게는 ‘타자의 얼굴’이 곧 ‘윤리적 명령’이다. 다른 이의 불행과 고통이 나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얼굴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나는 특히 사회적 참사를 마주할 때 마음이 오래도록 무너진다. 비통함과 함께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이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돈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참사 앞에 ‘사회적’이라는 말이 붙는다는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책임과 고통을 깊이 통감하게 된다. 아프지만, 그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 반복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다행히, 나는 건강한 HSP다. 살다보면 무례한 사람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지만, 모두가 나 같지 않음을 알기에 이 사람은 이렇구나 하고, 타인의 일과 나의 일을 되도록 명확히 구분짓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책을 읽고 뮤지컬을 보는 게 삶의 낙이고, 한 번씩 음주도 즐긴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괜찮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충분히 즐겁다.
한때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이 지나서야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된 적이 있다. 심지어는 내 생각과 반대로 나에게 굉장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반전의 경험이 꽤 있다. 이제는 ‘모든 부정적 신호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의 섬세함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너는 좋은 사람이니 더 당당해져도 괜찮다는 말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소심하고 불안해서 자기가 참고 손해보는 게 편한, 세상 착한 사람들에게 이 말을 똑같이 해주고 싶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도 당신은 여전히 좋은 사람일테니, 더 당당해져도 괜찮다고.
저자가 예민한 삶에 필요하다고 조언하는 것은 세 가지다. 바로 선택적 관계, 풍부한 취미와 의무적 휴식. 이것들이 동반된 민감자의 삶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에 더해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선택하라’고 단언한다. HSP에게 적합한 환경이란 소수 정예의 인간관계,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직장, 물리적으로 안전한 공간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은 환경이 중요하니, 환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능동적으로 고르라는 것이다. HSP는 적합한 환경 안에 있을 때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아낌 없이 헌신하고, 팀원간 갈등을 방지하며, 세심한 리스크 관리로 뛰어난 성과를 내는 무척 유능한 팀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나는 올해 시작한 변화가 도움이 되었다. 먼저, 글쓰기를 시작한 것. 브런치에 내 내면의 감각들을 천천히 풀어내고 있다. 스스로 들여다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 과정이 나를 돌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러닝. 달릴 때 느껴지는 기분, 심장 박동과 호흡이 오차없이 반복돼서 뛰고 있음에도 더 고요해지는 그 순간이 좋다. 마지막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기.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사람들 덕분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책에서는 예민한 이들의 감각 증폭의 가치가 심미안에서 탁월하게 발휘된다고 설명한다. 초감각자들은 음악, 그림, 영화, 책 속에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과 영감을 느낀다. 이를 통해 마음이 회복되고, 내면의 에너지가 충전된다. 최재훈 작가는 이런 HSP의 삶을 두고 ‘구도자의 인생’이라 부른다. 스스로를 정성껏 돌보고, 자신이 가진 감각의 극한까지 탐구하는 것. 우리의 삶은 참 아슬하게 아름답다.
작가는 불안하고 지친 HSP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심리학적 연구들도 소개하고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적어본다. 먼저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사람들은 부정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적응력을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나쁜 일이 닥쳤을 때 그 고통이 오래갈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빨리 회복한다. 결국 지나고 보면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내왔다. 크리스틴 네프가 말한 자기 자비(Self-compassion)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 따뜻할 것. 실패는 누구나 겪는 인간의 공통 경험임을 이해할 것. 감정에 과몰입하지 말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민한 사람들은 부정적인 신호뿐 아니라 긍정적인 신호에도 더 크게 진동한다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풍경, 위대한 음악과 예술, 다정한 마음 앞에서 남들보다 훨씬 깊은 감동을 느낀다. 그 기쁨으로 온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건, HSP들만의 특권이다. 따뜻한 웃음을 짓고, 그 온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그래서 감정의 깊이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쁨의 밀도다. 아픔을 오래 느끼는 만큼, 행복도 더 크게 느낀다. 고달픈 세상사와 인간의 부정 편향 때문에 외로움과 불안을 더 자주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사랑에 빠진 HSP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예민함,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온화함, 그것들이 결국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않을까.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그 아픔을 치유해주는 것도 결국 사람일 것이다.
저자는 예민한 사람들의 가장 큰 장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더 나아가, 예민(銳敏)한 사람들이 애민(愛民)하기에도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섬세한 감수성이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세상을 더 따뜻하게 지켜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부디 오늘도 당신이 조금 덜 지치기를. 스스로를 덜 책망하고, 사람들을 더 따뜻히 대할 수 있기를. 우리의 예민함이 세상을 더 사랑하는 힘이 되기를, 언제나 온마음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