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하므로, 이 세계는 견딜 수 있다
시간이 끝난다는 말은 불가능한 상상처럼 들린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태어나 늙고, 사랑하고 이별한다. 시간은 존재의 배경이자, 모든 변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그래서 ‘시간의 종말’이라는 개념은 죽음보다도 더 낯선 충격으로 다가온다.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은 이 낯선 상상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시간의 기원부터 종말까지, 우주의 첫 호흡부터 마지막 침묵까지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이 책은 과학으로 시작해 궁극적으로 하나의 철학적 물음에 닿는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왜 지금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오래도록 ‘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품어왔다. 성공, 명예, 성취, 영향력. 세상이 말하는 삶의 목적들은 한때 내게도 빛나는 답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내 마음을 온전히 채우지 못했다. 질문은 늘 마음속 어딘가에서 되살아났다. 정말 그렇게 살아간다면 만족스러울까?
책의 전반부는 과학적 설명에 집중한다. 빅뱅에서 시작해 초끈이론, 상대성이론, 열역학 제2법칙, 다중우주론까지. 복잡하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그린의 문장을 거치며 명료하게 풀려나간다. 그는 우주를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닌 하나의 장대한 이야기로, 시간과 존재를 품은 서사시처럼 써내려간다.
그 서사 끝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냉혹하다. 우주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흘러간다. 인간은 그 거대한 무관심 속에서 우연히 태어나 필연적으로 사라질 존재다.
그러나 나는 그 허무한 진실 앞에서 오히려 뜻밖의 위안을 느꼈다. 별의 조각들이 흩어지고 모이는 수십억 년의 긴 우연 끝에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 우주의 끝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경이롭지 않은가.
인간은 우주의 광대한 시간과 공간에 비해 너무나 작고 덧없다. 그러나 바로 그 짧은 생의 틈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내민다. 이 무심한 세계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다정한 주목은 도리어 신비롭다.
중반 이후 서사는 끝을 향해 나아가며 점차 차가운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태양이 수명을 다하고, 지구가 소멸하며, 은하가 충돌하고, 마침내 마지막 별마저 빛나기를 멈추는 순간. 엔트로피가 극에 달한 정적의 우주가 도래한다. 그때 시간은 작동을 멈춘다.
이 절대적인 끝에서 그린은 과학으로 답하지 않는다. 그는 과학이 아닌 인간 정신의 힘을 이야기한다. 상상력과 예술, 신앙과 사랑. 이 네 가지가 유한한 존재로 하여금 끝을 앞에 두고도 무너지지 않게 한다.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처럼, 백석이 흰 당나귀를 타고 사랑을 꿈꾼 것처럼, 삶의 이유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의미를 찾아가는 길은 아름답고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인간은 그 불완전한 과정을 견디며 끝내 의미를 완성해낸다. 그린은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말한다.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흔히 사랑은 사적인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이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바탕이며 존엄의 시작이다. 사랑은 감수성으로 확장되고, 연대는 사랑을 행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법을 세우며 정의를 꿈꾼다. 그 시작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함께 울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며,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서도 용기를 낸다. 그것은 생존 본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밤을 지새우고, 친구의 곁을 지키며 침묵하는 시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오늘을 바꾸려는 의지. 이 모든 것이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무심한 세계가 인간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항공통제병으로서 공군본부 지휘통제실에서 하늘을 지키고 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감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시간과 기억의 장소를 지키고 있다.
내가 하늘을 지키는 동안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한다. 누군가는 평화롭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어딘가에선 새로운 생명이 무사히 부모의 품에 안긴다. 하늘을 지킨다는 것은 그런 순간들이 가능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나의 임무는 인간의 삶을, 사랑을, 그리고 이 덧없는 세계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마음을 지키는 일이라고.
과학기술로 삶을 조금씩 나아지게 하는 사람, 글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며 울림을 건네는 사람, 무대 위에서 영감을 노래하는 사람, 재난 속 타인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 이 작은 행성 위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반짝임으로 서로를 향해 빛을 비추고 있다. 우리의 존재는 이상하고 별나지만, 아름답고 가치 있다.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주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그 질문은 독자 각자의 삶을 향해 날아든다.
우주가 결국 사라진다고 해도, 사랑은 다가오는 소멸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빵 터진 웃음이, 장난스레 맞닿은 손끝이, 조용히 나눈 말들이, 그 짧은 순간들이 시간 너머로 영원처럼 새겨진다. 언어가 사라지고 문명이 무너진다 해도, 서로가 사랑으로 이어졌던 순간은 가슴 속에 남는다.
영원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다. 칼 세이건이 말했듯,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떤 중력이 시간의 끝 너머까지 닿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다정한 말로, 누군가는 조용한 행동으로 사랑을 건넨다. 그 작은 행위들이 붕괴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세상을 견디게 한다. 밝은 미소 하나, 다정한 인사, 따스한 말 한마디가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다정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주의 소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다정함은 단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시간과 삶을, 곧 존재를 긍정하는 행위다.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의미한 우주를 의미로 물들이는 일이다.
나는 오늘도 우주의 작은 한 점에서 살아간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므로, 이 세계는 견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