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계의 국밥, 비빔밥, 불고기 같은 작품. 흔히들 ‘근본 있다’고 부르는 바로 그 작품. 『빨래』다. “이런 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해.” 관객들이 관람 후 입을 모아 말한다. 실제로 『빨래』는 교과서에까지 수록됐다.
뮤지컬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빨래』를 보자. 이미 뮤지컬을 사랑한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빨래』를 봐야 한다. 아, 벌써 여러 번 봤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마음을 달리해 다시 보면 된다. 『빨래』는 언제, 어떤 마음으로 보든 삶을 다독이는 손길로 우리를 맞이한다. 그래서 『빨래』는 뮤지컬계의 정석 같은 작품이다.
『빨래』는 서울 변두리의 작은 동네를 배경으로, 외국인 노동자, 여성, 비정규직, 노인 등 사회의 경계에 선 이들의 삶을 담아낸다. 극은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무게를 세심하게 조명한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곧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누군가는 언제나 ‘우리’였고, 누군가는 늘 ‘저들’로 불렸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들이 주인공이 되었을 때, 관객은 ‘우리’와 ‘저들’ 사이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처음엔 낯설고 멀게 느껴졌던 타인의 삶이 어느새 내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경험. 바로 그것이 『빨래』가 가진 진짜 힘이다. 극이 전개될수록 관객은 그 간극을 허물고, 더 넓은 연민과 이해의 지평을 갖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위로의 방식이다. 『빨래』는 사회적 연대와 다정한 말 한마디의 힘을 믿는다. 사실 수직적 폭력이 강한 사회일수록, 수평적 폭력도 더 빈번해진다. 강자-약자의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게 상처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빨래』는 작은 말 한마디로 다정하게 반기를 든다.
“힘을 내, 괜찮아.”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우리는 안다. 『빨래』는 차이를 차별로 정당화하는 사회에서, 차이를 개별자로 긍정하는 이들의 손을 맞잡게 한다. 이 연대는 뭉뚱그려진 연민이나 텅빈 메시지가 아니다. 일상 속 구체적인 온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작품 후반부, 등장인물들이 빨래를 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은 이 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시간이 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슬픈 니 눈물도 마를 거야.
자, 힘을 내.”
<슬픈 땐 빨래를 해>라는 넘버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치유’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이 장면을 보고 있자면 눈물이 나는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빨래』가 전하는 위로는 추상적이지 않다. 시간과 언어는 물질이며, 위로는 실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빨래』는 단지 보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물론 2005년 초연이라는 시간적 배경 탓에 “너무 옛날 이야기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약자에 대한 차별과 착취는 시대에 따라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존재한다. 외국인, 여성, 비정규직, 노인이라는 설정을 특정 계층만의 이야기로 국한하는 건 오히려 이 극의 본질을 놓치는 감상이다. 『빨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약자성’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맥락에 따라 소외와 고단함을 겪는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빨래』는 그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넘버 하나하나가 우리의 일상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참 예뻐요>, <슬픈 땐 빨래를 해> 등. 멜로디는 시원한 바람처럼 흐르고, 가사는 가슴에 시처럼 맺힌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마음속에 오래 남는 여운. 관객은 공연을 보며 자연스럽게 웃고 울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빨래』는 관객을 울리고 웃기고, 다시 일으켜 세운다. 어떤 날엔 국밥처럼 든든하고, 또 어떤 날엔 따뜻한 빨래 냄새처럼 포근하다.
165분간 울고 웃는 뮤지컬 롤러코스터.
인생이 고단할 때,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슬플 땐 빨래를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