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극단적으로 중간다웠다. 어중된 삶의 연속이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배를 곯고 살진 않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독하지도 모나지도 않아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사는 게 미덕인 줄 알았다.
나에게는 적은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배려할 대상도 없었다.
긴장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다. 가령.
아프리카적인 남자.
광활한 초원에 저들끼리 경계를 지키며 만족하고 사는 얼룩말과 코끼리 같은 사람.
궁전도 필요 없고, 그저 조그마한 오아시스만 있으면 좋았다.
열심히 달려간 그곳에 푸른 초장이 있으면 행복한 것이고, 중간에 이빨을 드러낸 포식자는 피해서 목숨을 건졌으니 미워하지 않았다.
희로애락이란 감정 세트는 추가로 대략 한두 개의 세트가 더 있을 수 있었고, 그걸로 내가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에 충분했다.
안분지족, 안빈낙도. 좋은 게 좋고, 과유불급이 일생일대 주요한 덕목 중의 하나였다.
그런 초식동물이었던 내가….
그녀를 만났고, 사랑했으며, 서약을 맺었고, 자녀를 잉태하고, 부모가 되고, 가장이란 게 되고 나서는….
푸른 초장의 풀뿌리 따위로는 배가 차지 않는, 살코기와 뜨거운 피를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맹수가 되어야 했다.
더 많이 먹어야 하고, 더 많이 뛰어야 하고, 더 많이 가져다줘야 하며, 더 많이 희생해야 했다.
안빈낙도의 삶은 쥐도 새도 모르게 막을 내리고 적자생존의 삶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초식동물이었다.
이빨과 발톱의 전장에서는 내 몸 자체가 사냥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예리한 발톱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목을 물고도, 심장을 움켜쥐고도 끝내 숨통을 끊어버릴 맹수의 본능이었고,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없고, 내가 가져야 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살코기와 피로 생존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문장과 사유로 재무장한 초식동물로 그대로 사는 것.
책은 내게 또 하나의 초원이었다.
활자라는 풀잎은 끝없이 자라났고, 한 권의 책은 내게 오아시스가 되어 나를 살렸다.
나는 허기를 달랬고, 지독한 갈증을 잉크 냄새로 풀었다.
그리고 언젠가 알게 되었다. 나는 단지 읽는 자로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는 피와 살로 삶을 증명하지만, 나는 문장으로 내 존재를 증명하기로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종이가 내 전장이 되고, 만년필이 내 무기가 되었으며, 잉크는 내 피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초식동물일 것이다. 맹수처럼 목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글 속에서만큼은 날카로운 이빨보다, 예리한 발톱보다 더 깊숙이 파고드는 힘을 키울 것이다.
두렵지만, 작가가 나의 소명이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맹수의 삶 대신, 살아 있음을 남기기 위해 쓰는 작가의 길,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초식 동물이지만 전장을 누비며 살아가는 길.
바로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