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아버지
최근에 나의 주말을 가슴 뜨겁게 보내게 했던 드라마가 있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대한민국의 모든 월급쟁이 시청자라면 자기 삶을 반추하며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 또한 울고 웃으며 드라마를 정주행 한 시청자였고, 마지막 회로 종영할 때는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싶었을 정도였다.
내가 특히 이 드라마에 감정이입이 되었던 이유는, ‘김 부장’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가 누군가의 상황과 절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나’는 아니었다.
“경기 자가에 중소기업 다니는 최 부장 이야기”.
아마 내 몫은 이쯤이었을 것이다. 만년 부장이라는 점에서는, 묘하게도 격한 공감을 하면서.
그 ‘누군가’는 나의 아버지였다. 당신은 한때 “서울 자가(自家)에 대기업 다니는 최 상무”였다. 만약 이 드라마의 스핀오프가 있다면, 제목은 아마 "성공한 김 부장 이야기"가 될 것이고, 주인공은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이랬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였던 아버지는 친절하지 않으셨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느그 아버지는 ‘본때’가 없어 다정한 말 한 번 해준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어머니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고도 했다. 내 눈에 아버지는 행복해하지 않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빌런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영어 과외를 받다가 “Will”과 “Bill”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뒤통수를 하도 많이 맞아서, 지금 내 머리가 납작해진 게 아닌가 원망도 많이 했다. 나에게도 아버지는 빌런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다. 로맨틱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특히 엄마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큰아들이기보다는 큰딸이 되고 싶었다.
자화자찬이 심한 사람이었다.
남해 깡촌에서 농업 겸업 목수의 장남으로 태어나 네 명의 여동생을 둔 전형적인 ‘귀남’으로 살아온 인생. 남해 수산고를 다니던 촌놈이 서강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마을 이장이 될 정도로만 공부하라던 할아버지의 자랑이었다. 대기업 입사까지 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반쯤 성공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지역색이 짙던 시절이라, 경남 남해 출신으로 광주 회사에 신입사원을 지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회사가 지금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상무이사까지 지냈다면 아버지는 이제 거의 성공한 인생이었다. 술만 드시면 수산고 촌놈이 서울에 상경해 대학에 입학한 이야기, 회사 앞에 大자를 붙여가며 연이어 상무이사 직함을 연호하는 성공 스토리는 오래전부터 감동이 아닌 공해가 된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삶 자체가 재미없는 안전제일주의자였다.
나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 자동차는 사는 순간부터 감가상각이 시작되는 물건이라며, 당신 돈으로는 살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상무이사로 승진하자 현대 중소형 세단 소나타가 임원 차로 나왔다며 좋아하셨지만, 정작 운전은 하지 않으셨다. 가만 보니 차에는 90년대 중반 유행하던 커다란 카폰과 메뚜기 더듬이 같은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조수석에 한 번쯤 타보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98년 명예퇴직하실 때까지 나를 태워주지 않으셨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튼튼해 보여도 건너지 않는 분. 시세차익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집으로 가세를 불리는 일은 아버지와의 끈질긴 설전 끝에 이뤄낸 어머니의 결과였다. 퇴직 후 여러 곳에서 회장님으로 모셔 가려했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모두 고사하셨다. 다 당신 이름을 빌려 대출받으려는 속셈으로만 보이셨다 하셨었다.
주말마다 아버지는 소파 와불(臥佛)이었다.
늘 누워 TV만 보셨다.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마라톤 중계였다. 42.195km의 시작과 끝을 늘 함께 보셨다. 중간에 채널을 돌렸다가도 결국 다시 마라톤으로 돌아왔다. 나는 옆에 앉아 같이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시선은 오직 마라톤 현재 순위에만 고정돼 있었다.
소파 앞 탁자에는 수분과 세월을 먹어 두툼해진 동아 국어사전과 옥편, 철 실로 단단히 묶인 이면지 메모 뭉치가 있었고, 몇 장의 메모는 매일경제 신문 스크랩과 함께 유리판 아래 끼워져 있었다. 흡사 지금의 컴퓨터 관세시스템의 대시보드처럼, 그것은 아버지 삶의 상황실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삶을 닮고 싶지 않았다. 또렷또렷한 서울 사람이 되고 싶었고, 평생 월급쟁이로 경쟁하며 사는 삶이 피로해 보였다.
아버지는 내 연민이자 증오였다. 당신만 지루하게 사시지, 어머니와 나와 동생에게까지 그 지루함이 옮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고리타분함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철이 들기 시작해서였을까? 아마도 내가 월 급여 노동자가 되고 나고부터였을 것이다.
약 백만 번째로 듣고 있는 아버지의 레퍼토리가 다르게 들렸고, 급기야 신선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내게 세상 최고의 멘토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마라톤 중계의 수수께끼도 풀렸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훌륭한 멍 때리기 콘텐츠였다.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셨으면 그런 멍 때리기 프로그램이 필요했을까.
내 머리통은 공부 못한다고 때리셔서 납작해진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게도 그냥 아버지 머리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갓 들어갈 때쯤 선뜻 포크기타를 사주셨던 게 기억이 났으며( 그 기타가 정말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었다), 타는 건 네가 알아서 배우라고 하셨지만 오토바이자전거도 사주셨던 속으로는 다정하셨던 아버지였다. 롤러스케이트, 501 청바지, 워크맨 같은 것은 절대로 사주진 않으셨지만 먹는 거는 소갈비던, 돈가스던 먹고 싶어 하는 데로 사주셨었다. ( 물론 임원이셨을 때, 법인 카드로 사주셨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 코스모스 졸업할 때까지 사전에 취직하지 못한 못난 아들에게는 양복도 한벌, 언제 어디에서 면접 소식은 들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LG 싸이언폰도 사주셨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비로소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되었다.
마라톤 중계를 넋 놓고 보던 그 남자는,
이 시대의 월급장이의 모범이었다.
훌륭한 아버지셨고, 의무를 다 하셨으며,
그리고 내 회사 인생의 최고의 멘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