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 3 역대급 무대모음 - 신해철&양파&정재일 '민물장어의 꿈'
한국 가요 역사에서 최고의 가사 한 곡을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노래를 집고 싶다. 얼마 전 타개한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이란 노래가 그것이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 하는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마지막 한 문장이 이 노래 가사의 백미다. 인생이란 딱히 목표도 없고 이유도 없는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과정일 뿐, '무엇'도 아님을 알았던 신해철은 인생의 의미를 인생에서 찾지 않았다. 나의 외부에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무대일 뿐이고, 그 무대에서 나를 보여주는 행위를 통해서 어떠한 포장과 가식도 없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이 인생에 유일한 의미라면 의미가 아닐까.
'무엇'이 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왔던 내 인생이란 게 사실 나로부터 멀어지고 내가 아니게 되는 역설이란 걸 알았을 때의 참혹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인생은 나로부터 멀어져간다. 이제라도 다시 원래 태어났던 그대로의 나를 찾아가기 위한 기나긴 역주행의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가사에 이렇듯 아름다운 멜로디를 붙인 명곡을 만들어 놓고는 훌쩍 떠났다. '자신의 장례식에 울려퍼질 곡'이라고 스스로 말해놓은 탓에 이 노래는 그가 떠난 이후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졌다. 특히 김태원이 이 노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다시 불러준 무대가 참 감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 노래를 가장 절절하게, 가장 빛이 나게 불러준 무대가 바로 나는가수다3 가 아닌가 한다. 이 무대는 경연곡의 하나로 선곡되어 양파가 불렀지만, 이 무대의 주인공은 그녀 외에도 2명이 더 있다. 당연히도 곡을 만든 신해철, 그리고 또 한 명은 이 노래의 피아노 반주를 맡은 정재일이다.
그는 대중음악계에서는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난 천재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벌써부터 온갖 앨범, 공연, 퍼포먼스의 작곡, 연주, 프로듀서를 맡아 종횡무진이다. 얼마 전엔 판소리와 피아노의 만남으로 내 놓은 앨범, [바리 abandoned]가 한국 대중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정말 정말 명반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아름다운 곡과 절절한 보컬도 뛰어나지만 피아노의 편곡, 연주가 범상치 않다. 원곡의 피아노 흐름을 어느 정도 따르는 듯 하지만 마치 하나의 연주곡처럼, 어찌 보면 보컬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이래서는 '반주'라고 하기엔 주제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멜로디와 반주가 부조화스러움을 넘어 묘하게 어우러지기 시작하면서 곡과 보컬의 아름다움을 배가 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이 정도면 반주라고 부를 수 없다. 뭐랄까 양파와 피아노의 듀엣이라고나 할까. 각자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따로 또 같이 어울린다. 신기하다. 특히 정재일 특유의 전위적이면서 드라마틱한 연주 스타일이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보컬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다. 클라이맥스 부분에 가서는 격렬하게 곡을 고조시키는 힘이 오히려 보컬을 떠미는 듯하는 힘을 가진다. 이런 전개는 신해철의 보컬로는 어울리지 않았을 흐름인 듯하다. 양파의 연약하면서도 내실 있는 보컬과 만나 섬세하지만 폭발력 있는 곡으로 완전히 재탄생했다. 그러니
이 무대의 주인공은 3명이다. 작사/작곡 신해철, 보컬 양파, 편곡/연주 정재일. 누구 하나 경이롭지 않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어디서 다시 보든 언제 보든 기립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의, 그야말로 격이 다른 무대다.
http://tvcast.naver.com/v/307199
(정재일의 피아노에 귀 기울여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특히 도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