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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Apr 07. 2022

기다림의 맛, 부타노 가쿠니

요령과 편법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

※ 돼지고기 (삼겹살 or 앞다리살) + 대파 + 생강 + 물 (1시간 30분) → 두툼하게 자른 고기 + 가쓰오부시 육수 + 청주 + 간장 + 설탕 (1시간 30분)


일본의 대표적인 가정식 고기 요리. 한국에서 즐겨먹는 삼겹살 구이나 제육볶음 같은 일본의 가정식 고기반찬 요리다. 요리 방식으로 보자면 수육과 장조림의 결합이라고나 할까. 중국의 동파육이 변형된 요리지만 그보다는 조리과정이 훨씬 간단하다. 가쓰오부시 육수를 사용하고 오래오래 끓인다는 점이 이 요리의 포인트. 오래 끓여서 지방은 살살 녹고 살코기는 부드럽게 찢어진다. 대개 고기 부위보다는 삼겹살이나 목살을 사용하는데 너무 기름진 걸 싫어하는 사람은 앞다리살도 괜찮다. (나는 뒷다리살 부위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의를 요한다. 어떤 주의인가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요리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김치 대신 겨자를 곁들이면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점. 찐 양배추에 싸서 먹으면 또한 일품이다. 안 그래도 맛있는 돼지고기에 이런 정성을 쏟으면 맛없을 수가 없지. 게다가 처음 우린 육수는 남겨두었다가 라면으로 끓이면 바로 돈코츠 비슷한 맛이 나는 '라멘'이 된다.(앞서 포스팅한 글이 바로 이 육수로 끓인 '결국은, 라면'이다.) 2차로 졸인 가쓰오부시 간장물엔 삶은 계란을 담가놓아 계란 장조림으로 먹을 수 있다. 장조림 중 최고는 역시 계란 장조림이지. 1타 3피의 고효율을 자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요리.


겨자에 곁들여 먹으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부타노 가쿠니


이렇게나 맛있고 효율이 좋은 요리다 보니, 가끔씩 해 먹곤 하는데 인생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 하다 보면 요령이 생겨 좀 더 편하게 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간단한 요리라도 '이다음에는 뭘 해야 하지?'하고 당황하며 쓸데없이 허둥지둥하기 마련인데, 그냥 잠시 손을 놓고 차근차근 생각해보거나(뭔가 끓거나 볶이고 있으면 불을 줄이면 된다), 한 두 가지를 놓쳐도 나중에 추가해도 그만인데 말이다. 그래도 요리의 전 과정을 몇 번 경험하고 나면 그때마다 결과물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자신감이 붙게 되고 결국 아무런 당황 없이, 간혹 건너뛰어도 되는 과정은 생략해가면서 여유롭게 요리를 해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때 벌어진다.


인간이란 참 간사해서, 뭐든 요령이 생겨 곧잘 하게 되면 그 요령이 편법이 되고 편법은 조금씩 늘어나다가 결국 어느 순간 결과물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파국을 초래한다. 무너진다고 표현하니 바로 위대한 대한민국의 '부실 건축'이 생각난다. 건축이야말로 여러 가지 요소와 과정이 중첩되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보니 생략과 축소 등의 편법이 즐비하지만 그럼에도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편법이 겹치고 더해져 어느 수준을 넘게 되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요리는 아무리 비극적이어도 건축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점에서 천만다행이지만, 사실 무너지는 과정은 똑같은 원리를 거친다. 그러니까 '요령'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인간의 간사함(을 넘어서는 사악함)이 과도한 편법에 손을 대게 되고 그 결과는 참혹하다. 돼지고기 요리 하나를 놓고 너무 심각한 반성이 아니냐 싶은데, 왠지 그런 것도 같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부타노 가쿠니는 정말 부드럽고 맛나면서도 과정이 복잡하지 않은 간단한 요리지만, 초벌 고기 삶기 1시간 30분 + 간장 졸이기 1시간 30분, 총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요리의 단점이면 단점이다. 그리고 이 단점은 가끔씩 삶는 과정을 살펴봐야 하는 번거로움과 함께 빨리 먹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을 인내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난관이 있다.(익어가는 고기를 쳐다보며 언제 먹을 수 있지? 라며 입맛을 다시는 일은 생각보다 큰 고난이다) 그래서 결국은 '편법'의 칼을 뽑아들기에 이르는 것이다. '1시간 30분에서 몇 분만 줄여도 괜찮지 않을까, 10분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다. 뭐 10분 정도는 크게 지장이 없다. 역시나 살코기는 부드럽고 비계는 살살 녹는다. 부위를 좀 더 싼 걸로 해보면 어떨까, 삼겹살은 비싸니 앞다리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 대개 오랫동안 끓이는 고기 요리는 앞다리살로도 충분하다.(수육이 그렇다) 그렇게 편법에 편법을 더하다가 언젠가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을 넘는 순간이 온다.(그 선을 우리는  전문용어로 'threshhold'라고들 한다) 나의 경우엔, 끓이는 시간을 각각 30분씩(총 1시간)을 줄이고 고기 부위를 뒷다리살로 바꾸었다. 그랬더니, 결국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초벌 삶기 1시간 30분 + 간장 졸이기 1시간 30분


조리시간을 줄이고 부위를 바꿨더니, 살살 녹는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퍽퍽한 지루함만 남았다. 이 요리는 더 이상 '부타노 가쿠니'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정체불명의 되다 만 요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부실 요리'인 것이다. 다행히 건축과는 달라서 어떠한 인명 피해도 금전적 손실도 없이 마무리되었지만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은 남았다. 물론 한 끼 식사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낭패는 치러야 하는 가장 큰 대가다.


요리 하나를 두고 너무 비장한 감이 없지 않으므로 실용적으로 글을 마무리해보자. 결국 이렇게 저렇게 요령과 편법과 부실을 왔다 갔다 해본 결과, 고기 부위는 뒷다리살보다는 앞다리살(혹은 삼겹살이면 더 좋겠지), 그리고 조리시간은 그냥 3시간을 꽉 채우는 게 최선이다.(아마도 삼겹살 부위에 2시간 조리면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실험해보진 않았다. 또 한 번 패배감을 경험하고 싶진 않다. 1시간을 더 끓게 놔두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그저 조급했을 뿐) 참고로 조리과정 중 절대로 생략하면 안 되는 절차가 '가쓰오부시 육수내기'다. 가쓰오부시는 이 요리의 DNA와 같기 때문인데, 고기의 육향에 씹을수록 더해지는 감칠맛은 여기서 비롯된다. '육류 + 해산물'은 언제나 진리의 조합이지 않은가. 그리고 간장에 더해 타마리 간장이라는 일본식 조미간장을 더하면 더 맛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편법이 발휘될 수 있는데, 가쓰오부시 육수내기가 귀찮으면 간장 대신 쯔유를 쓰는 방법이 있다.(쯔유가 '간장+가쓰오부시+설탕' 아니던가) 결과물의 맛을 어느 정도 무너져 내리게 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나는 웬만하면 가쓰오부시를 굳이 우려서 하는데 왠지 이 과정은 편법을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은 막연한 느낌 때문이다.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랄까. 김치 담글 때 조미료를 쏟아붓는 느낌이랄까... 설탕은 대개 권장하는 레시피에서 2/3, 혹은 1/2로 줄인다. 덜 단만큼 덜 맛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단맛의 수준이란 혀가 어떻게 길들여졌는가와 관련되기 때문에 내 입맛에는 그 정도로도 괜찮다. (하지만 역시 권장량대로 넣는 게 더 혀에 감기는 맛이겠지. 설탕의 양이랑 어떤 요리든 항상 고민되게 마련이다)


이런 간단한 요리에도 벌써 몇 가지의 편법이 있는지 모른다. 계속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과연 '정석'이란 무엇인가, 혹은 '정석'이란 게 따로 있는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확실하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가 더 맛난 식사를 보장한다는 것. 여기에 배고픔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요리란 물질과 물질의 결합과 가해진 에너지가 일으키는 화학반응의 결과겠지만 그런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성과 보람'의 경험일 테고, 그런 인간적 경험이야말로 레시피를 넘어서는 진정한 요리의 즐거움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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