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더 글로리』
멜로의 대가 김은숙마저도 폭력과 구원을 말한다는 건, 이 시대가 어떻게 망가져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징후 같은 게 아닐까.
현실보다는 현실에 없을 쾌감을 완성시키는 환상을 주조하는데 솜씨가 뛰어난 김은숙답게 복수도 카타르시스의 짜릿한 환상으로 보는 이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데 주력한다. 그러니까 판타지 드라마라는 면에서 그간의 멜로와 같은 연장선을 가지는 드라마라 할 수 있겠다. 그 테마가 멜로에서 복수로 바뀌었을 뿐. 그리고 현실의 불만을 충족시켜주는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게 TV드라마의 본래적 임무였음을 기억한다면, 이토록 TV드라마의 역할에 충실한 완벽한 판타지 복수극이 있을까.
하지만 이토록이나 통쾌하지만, 그 통쾌함만으로는 완전히 연소되지 않는 찝찝함이 남는 건 역시나 악역이 재현하는 악의 현실성 때문일까. 이렇게나 완전하게 '악'으로 재현된 캐릭터들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TV를 끈 후에도 두려움의 잔여감이 남아있다는 건, 그것이 단지 판타지일 뿐이라고 도무지 생각되지 않기 때문일까. 도대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망가져가고 있는가.
송혜교는 전작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실패를 딛고(흥행 면에서만이 아닌 작품 면에서도 그렇다), 멜로가 아닌 복수의 화신으로 완벽하게 재기하는 듯하다. 그녀가 멜로보다는 장르물, 특히 이런 깊고 센 캐릭터를 수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그녀의 오랜 팬으로서 용감한 선택에 손을 들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가진 마스크와 연민을 자아내는 동공과 눈빛은 '문동은'이라는 역할의 상처와 아픔을 증폭시켜 준다. 심지어 어쩔 수 없이 복수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처연한 운명과 그 가운데에서도 남아있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애를 모두 담는, 깨져버렸지만 단단하게 이어붙인 그릇의 이중적 측면을 충분하게 소화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연기와 캐릭터의 케미가 가장 좋았던 드라마는 『남자친구』와 이 드라마 『더 글로리』가 아닐까 한다.)
악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에의 감정이입, 복수극의 치밀한 작전과 퍼즐 맞추기의 흥미로움, 빠른 사건 전개와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재미요소가 대단한 몰입감을 선사하지만, 역시나 감출 수 없는 김은숙의 '보호'에 대한 본능, 무조건적 인간애를 열망하는 '순진함'이 팽팽한 극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한다. 이것은 과한 긴장감의 압박에 쉬는 시간을 주는 효과보다는 캐릭터와 사건 전개에 조여 놓은 나사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전체 이야기의 구조를 흔드는 안이한 부실공사가 될 위험을 초래한다. 특히나 무조건적인 조력자로 등장하는 의사, 주여정의 등장은 이야기에 탑승하는 자연스러운 화학적 결합이라기보다는 복수의 해결을 위한 필요로 소환된, 그리고 멜로 라인을 끼워넣기 위해 무리하게 장착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김은숙 드라마에 이런 순정한 기사 캐릭터가 빠진다면 그건 또 아쉬운 일이 아니겠는가.(그럼으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게 된다.)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김은숙의 이야기와 캐릭터는 그리고 특유의 대사의 힘은 우리를 충분히 끌어당기고도 남는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만 차마 뱉지 못하거나 혹은 진정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몰라 삼키고 말았던 저 마음 깊은 곳의 간절한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말의 향연들.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고 통쾌하게 완성된 문장으로 완벽한 타이밍에 배치하는 그녀의 대사력은 이번 드라마에서도 여지없이 그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또, 도입부부터 보는 이를 영상으로 끌어들이고 세심한 미장센과 몰입감 높은 속도로 시선을 떼지 못하게 사로잡는 안길호 PD의 연출과 화려한 악의 조연들의 연기는 이 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백미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가진 재미 요소 외에도, 평등의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빈부의 격차와 계급의 분화, 그에 따른 권력의 작동 방식과 천박하게 나뒹구는 욕망의 지도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데서 이 드라마가 가진 사회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은숙마저도 이런 폭로의 이야기를 만들게 하는 지금의 사회란 건,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복수의 판타지가 주는 카타르시스에만 매몰되지 말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에서 말하듯, 신도 사라지고 친구도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어디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극본: 김은숙
연출: 안길호
출연: 송혜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