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분리된 사람들,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제대로 된 작가라면 누구나 세상을 보는 관점, 즉 자기만의 눈이 있고 그 눈이 유독 들여다보게 되는 세상의 어떤 면(面)이란 게 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어떤 면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여다보게 되면, 그 면에 대해서는 독보적인 앎을 얻게 된다. 세상의 어떤 면에 대한 자기만의 눈과 독보적인 앎, 그것을 우리는 작가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여름 한철 울어대는 작은 매미 한 마리라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거대한 생물체가 되고, 그렇게 매년 여름 매미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일이 반복되게 되면 흔하디 흔한 매미에게도 우리가 지나쳐 왔던 생존 방식의 어떤 면이 있고, 그들이 생존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학이란 거창한 이론일 수도 있지만 이런 끈질긴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앎이 아닐까.
생물학자에게 매미와 같은 존재가 작가에게는 인간일 테고, 매미의 생존 방식이란 게 작가에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 방식일 것이다. 매미의 생존 방식에 대한 연구를 위해 생물학자에게 현미경이 필요하듯,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앎을 위해 작가에게는 작가만의 눈, 즉 인간의 어떤 면을 현미경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인간의 그 어떤 면이 '상실'이라면, 김연수에게는 '소통'일 테고, 가와세 나오미 감독에겐 아마도 '분리'가 아닐까 싶다.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인간으로부터의 분리. 그 속에서 고립되어 거대하고 깊게 뚫린 마음의 구멍을 안고 사는 인간의 심연. 작가는 애써 그 심연을 들여다 보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도 아주 고밀도의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때로는 아주 잔인하게, 때로는 한없는 애정으로. 그리고 그렇게 들여다 본 암흑의 심연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아니 아주 심각하고 불편하다.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세상과 분리된 인간이라. 마치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특이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다소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긴 하지만, 그런 구체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의 특수한 심리, 기형적 심리를 다루고자 하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사실 영화 속 극단적인 상황이란 마음속에 극단적인 아픔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극단적이지 알고 보면 그리 특수한 상황만도 아니다.(가령,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다거나, 자식을 일찍 보낸다거나, 감옥에 갔다 온다 거나, 질병으로 격리된다거나...)
그녀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외로움, 고독, 고립감을 들여다보고 그 심연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근본적인 위안과 해소를 고민한다. 그리고 묻는다. '인간은 왜 불온전하며 어떻게 해야 온전한 평안을 얻을 수 있는가?' 작가는 그 불온전함의 근원을 '분리'에서 찾고, 온전한 평온을 '자연과의 연결'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녀의 영화는 어렵고 심각하고 불편하지만 결국에는 큰 위안을 선물처럼 가져다 준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눈, 그녀가 가진 철학의 힘이고 영화의 힘이다.
그녀의 작품 중, 비교적 대중적이라 할 만한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가 얼마 전 개봉했다. 사실 그녀의 영화인 줄도 모르고 음식 영화라는 기대감에 무심코 보게 되었지만, 영화 도입부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여 적잖이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작가로서 참 좋아하긴 하지만, 그녀의 영화가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다는 걸, 아니 오히려 아주 심각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터라 조금은 걱정이 앞섰다. 그녀의 영화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주제의식을 담고 있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그렇게 집중해서 보지 않을 경우엔 영화가 쓸데없이 길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래서 가와세 나오미의 작품은 그런 태도로 봐서는 안될뿐더러 그런 태도는 거장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다. 나는 휴일 오후의 편안함을 반납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영화를 현미경의 눈으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후로는 줄거리 상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데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는 정보이지만, 그래도 민감한 분을 위해 알려둡니다.)
이 영화를 줄거리로 말하자면, '연륜 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어느 할머니의 도움으로 음식의 맛을 제대로 내는 요리사가 되어 개과 천선하는 한 범죄자의 이야기' 정도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와세 나오미는 줄거리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과 앎을 전달하는데 충실한 작가다. 그래서 그 눈이 주목하는 지점, 그 앎이 통찰하는 심연, 즉 '세상과 분리된 인간'의 마음 상태가 이야기의 모든 것이다.
도라야키 매장의 요리사인 주인공은 범죄를 저지른 이후 사회로부터 격리된 경험과 그로 인한 심리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를 돕는 할머니는 나병이라는 질병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그야말로 모든 세상과 격리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가족과 학교를 스스로 격리시킨 한 고등학생이 등장한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이 작은 공간에 모여 같이 하는 일이 있는데, 바로 일본의 전통과자 도라야키를 만들고 먹는 일이다. 같이 음식을 만드는 경험을 통해 서로 위안을 찾는다는 구조는 영화 [카모메 식당]과 같지만, 이 영화에서 음식은 [카모메 식당]에서처럼 단순히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가와세 나오미에게 분리된 인간을 치유하고 격리된 마음을 열게 해 주는, 그래서 연결된 마음이라는 안정으로 접어들게 하는 매개이자 촉매제는 '자연'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자연에 대한 존중, 섬김의 정신이 닮겨 있다. 한 가지 주의할 건, 최근 유행하는 자연주의 영화에서 처럼 자연의 역할이 단지 인간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배경에 지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가와세 나오미에게 자연은 그 이상의 더 깊은 의미와 역할이 담겨있다.
그녀의 영화는 인간이 자연을 통해 마음을 치유한다는 이야기를 가지지만, 이야기의 이면에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태어났지만 인간이 분리된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건 자연과의 격리때문이며,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듯 인간과 인간이 분리되는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분리로 인해 인간은 상실된 존재감을 심연에 질병처럼 갖게 되는데, 근본적인 치유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의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그녀의 영화에서는 유독 자연의 풍광이 단지 아름다운 풍경으로서만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세상으로 보여진다. 그녀의 영화 속에서 자연를 보여주는 카메라가 유독 정지된 듯 길고 넓고 깊은 시선을 가지는 건 자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인간을 보여주는 반복된 장면은 그 자체로 그녀의 철학을 담고 있는 미장센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그녀의 영화 중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대사로 전달해 주는 친절한 영화에 속한다.(아마도 원작을 각색했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에서는 주로 할머니의 대사를 통해 그녀의 철학이 집약되어 묻어나온다.
할머니가 마지막에 읇조리는 저 대사는 영화의 클라이막스이기도 하고 할머니의 인생에 대한 회한을 담는 말이기도 하지만,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골라낸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대사에서의 '세상'은 그녀의 관점으로 보자면 아마도 '자연과 인간'이 아닐까 싶다. 세상을 보고 듣는다는 것은 자연, 인간과 교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녀의 영화는 보기엔 힘들지만, 보고 나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마음이 커지고 위안을 받고 어딘지 모르게 겸손하게 만드는, 무엇보다 세상과 자연과 연결되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대한 예술작품이라 할만 하다.
* 영화 예고편 보기 : http://tvcast.naver.com/v/527621
** 영화에 등장하는 팥 앙금은 정말 너무도 먹음직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바로 만들어본 앙. 음식 영화는 이런 점이 좋다!
***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글.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를 마케팅에서처럼 단순히 '따뜻한 음식 영화'로 보는 그의 시선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특히 '관념적인 감상주의'라는, 그야말로 감상적인 표현은 평론가의 평이라고 하기엔 아쉽다. : http://blog.naver.com/lifeisntcool/220479490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