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나라 아일랜드의 음악영화, [프랭크]
사실 영화를 보고 가장 인상에 남는 대사는 이 말이었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거든
유일한 재능은 진드기처럼 재능 빨아먹기
이 영화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청년이, 놀랍게도 창의적인 밴드 SORONPRFBS(이름이 왜 이따윈가, 뭐라 읽어야 하는 건지), 그중에서도 밴드의 음악을 주도하는 프랭크라는 독특한 인물을 쫓아 다니며 얻게 되는 이러저러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프랭크에게 음악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고생과 구박을 견디고, 사비까지 털어가며 집세를 내는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밴드 멤버로 부터 저런 말을 듣게 된다. '네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얼마나 섬뜩한가. 이쯤 되면 음악영화라기 보다는 정말 슬프고도 슬픈 한 청년의 인생 좌절 스토리라 할 만 하다.
그는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프랭크만 있으면 되니까. 그와 함께 그로부터 배워나가면 되니까.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성사된 프랭크와의 무대에서 그토록 따르고 칭송해 마지않던 자기만의 영웅으로부터 듣게 되는 말은 더 비참하다.
네 음악은 구려
Your music is shit
보는 사람까지 다 아픈 말이다. 나도 나름 창작의 세계(광고기획서가 무슨 대단한 예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창작은 창작이다.)에 몸 담고 있다 보니, 저런 말이 얼마나 만든이를 아프게 할지 생각만 해도 무서울 정도다. 하지만 가끔 정말 비슷한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다. ‘이 직업은 너한텐 어울리지 않아’라는 말. 혹은 ‘과연 내가 이 직업에 재능이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나 자신한테 들 때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그 무언가를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이란 다른 것이다. 그게 일치되면 참으로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비극은 시작된다. 특히 그 하고 싶은 일이 창작, 예술과 관련된 종목이라면 더더욱. 대개 예술과 관련된 일이란 하고 싶어도 그냥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잘 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은 정말이지 거대하다. 하지만 예술이란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재능이란 게 필요하고, 그 재능이 많고 적음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도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다. 물론,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정말 ‘어느 정도는’의 문제고, 심지어 재능이 없을 경우에는 아예 노력이 소용없는 경우도 있다. 이 영화 속 주인공 존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름도 ‘존’이다. 얼마나 평범한 이름인가 존.)
슈퍼스타K의 각종 통령들 또한 그런 경우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시청자로선 재미있긴 하지만, 한 편으로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진지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정작 그들은 심각하다. 노래할 때, 인터뷰할 때의 그들을 보라.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심각하게 말하는가.
더 비극적인 게 또 있다. 하고 싶은 걸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비극적이지만 자신이 잘 못한다는 걸 모르는 것도 비극이다. 너무 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시각이란 도대체 갖게 되질 않는 것이다. 벌거벗은 자신을 마주 대한다는 건 너무 두려운 일이니까.
존은 그 모든 경우를 다 갖춘 인물이다. 음악을 정말 사랑하지만, 음악을 잘 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음악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아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니까 노력하면 언젠가 자신도 프랭크처럼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의 곁에 있던 밴드의 멤버들이 ‘이게 현실이야’라고 얘기해 주지만, 그 마저도 소용없다. 자신은 음악을 잘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건 열정을 넘어 과업같은 것이 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정말 그런 착각이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만일까. 다시 둘러보자. 영화 속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존뿐이겠는가. 밴드의 모든 멤버들은 모두 음악을 사랑해마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음악에 바칠 정도로. 마치 음악적 성취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들은 음악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은 프랭크처럼 천재가 아니라는 걸. 그래서 천재의 음악성에 의지해 그를 도우면 놀라운 음악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걸 애초부터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재능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있다는 얘기다. 그들은 차라리 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알아. 아무리 노력해도 구린 곡만 나오는 그 기분
그래서 그들은 프랭크를 굳이 따라하려 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음악을 즐기려 할 뿐. 하지만 왜 존은 그러지 못했을까. 그도 다른 멤버들처럼 똑같이 음악을 사랑했는데. 왜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프랭크를 따라하려 할 걸까. 그저 눈치가 없어서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다시 던져볼 수 있다.
그는 과연 정말 음악을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음악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던 걸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영화에서는 친절하게도 단서를 달아준다. 영화 속에서 존이 집착하는 건 프랭크뿐만이 아니다. 바로 SNS다. 그는 유튜브에 앨범 만드는 장면을 몰래 녹화해서 업로드를 하고 이 때문에 다른 멤버와 불화를 겪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른 멤버들과 존의 차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음악을 남에게 보여주는데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Like’해 줄지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의 관심이란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존이 프랭크에게 강조하는 대사에서 그의 진심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유튜브의 ‘Like’ 횟수는 계속 숫자를 늘려가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음악을 좋아하고 있어!’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지만,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닐까.
몇 명이 우리의 음악을 좋아해 주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물론, 내가 만든 음악을 많은 사람이 좋아해 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반대로 내가 만든 음악을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는다면 그건 또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음악을 만든 결과에 해당한다. 음악을 만드는 동기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만든 음악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줄까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심이지만 많은 사람의 좋아해 주는 것이 음악을 만드는 동기가 되는 건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음악은 만들고 싶어서 만들어야지,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서는 진짜 음악이 아니다. 그건 '음악에 대한 사랑'의 결과가 아닌, 사람들이 좋아해 줄 '나에 대한 사랑'의 결과다. 그 순간 음악은 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목적이 음악인 음악과 음악이 수단인 음악은 다르다.
뭐가 다른가. 음악이 목적인 음악에는 만든 이의 영혼이 담기지만, 음악이 수단인 음악에는 영혼이 담기는게 아니다. 시스템과 테크닉, 그리고 과도하게 포장된 자신의 모습만 담길 뿐. 그런 건 진짜가 아니다.
그런 뜻이다. ‘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의 의미는. 정확히는 네 안에는 음악이 없다는 말이겠지. 영혼이 죽어있다는 말이거나. 그 안에는 그저 자기 자신 밖에 없다. 그것도 사람들에게 환호될 '상상의 자신'. 아이러니하게도 상상의 자신으로 가득 찬 내면은 텅 비어있는 셈이다. 상상의 자신밖에 없으니까 상상의 자신만 담고 있는 자신은 그 자체로 상상밖에 안 된다. 진짜가 없고 텅 빈, 껍데기다.
잘 들어 존,
"나는 왜 프랭크가 될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 거야. "나도 프랭크가 될 거야"라든지. 하지만 프랭크는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어.
껍데기는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텅 비어있으니. 자신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멋진 자신이 되고 싶다'라는 욕망은 강한 것이어서, 배움으로 자신을 채우려 하기 보다는 그저 빨리 멋진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한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건 이미 있는 날 찾아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이런 껍데기의 인생을 살고 있다면 죽기 전에라도 자신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 게 차라리 좋을 것이다. 마치 프랭크를 쫓아 다닐 때의 존이,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게 된 존보다 차라리 더 보기 좋아 보였던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다. 존이 빠졌을 때 비로소 밴드는 완성되고, 프랭크는 창의력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빠졌을 때 밴드가 부르는 마지막 장면의 노래가 이 영화의 주제가이자 가장 멋진 노래이기도 하다. 자신이 밴드와 프랭크의 창작력을 망쳤었다는 걸 확인사살하는 극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쓸쓸히 퇴장하는 존. 그 쓰라림이 얼마나 클까.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 하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인정했다는 경험은 비로소 자신 안에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한 셈이니까. 텅 빈 채로 살다 죽는 게 아닐 수 있게 된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씁쓸하다.
음악을 바라보는 감독의 생각이 그야말로 강렬하게 담겨 있는 영화다. ‘예술은 천재적인 재능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야’같은, 천재주의에 입각한, 다소 낭만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극단적이고 편협한 사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천재주의 예술관을 말하려 했다기보다는 음악 그 자체의 숭고한 아름다움, 음악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음악성의 평가에서 대중성의 배제 같은 화두를 던지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특히나 요즘같이 음악이 스낵처럼 소모되고 증발하는, 그리고 ‘좋아해’ 수에 따라 음악의 가치가 결정되는, 이런 시대에 음악의 독자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를 집중 조명하고 그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꼭 필요하고 의미 있고 영화라고 강조하고 싶다.
프랭크가 작은 보푸라기 하나에도 영감을 받고 노래로 만드는 장면은, 존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그리고 프랭크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참 좋다. 세상에 프랭크같은 천재들은 짐작하는 것보다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안타까운 건 이런 천재들이 프랭크처럼 세상 속에 은둔해 있지 말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그런다 해도 대중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또 묻히고 말겠지만. 그렇게 묻히고 만 천재 예술가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겠는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